어느새 계절은 가을을 지난다.
나는 자주 멈춰 서서 바람의 결을 느낀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방향, 마지막으로 그 잎이 떨어지며 남기는 빛의 각도, 그리고 바람이 남긴 잔향 속에 묻혀 있는 시간의 무게를 느낀다.
계절의 이행은 언제나 그렇게 온다.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고 분명하게.
들판에 서 있으면 알 수 있다.
모든 변화는 눈에 보이지 않게 시작된다는 것을.
바람은 문을 닫듯, 한 시절의 끝을 고한다.
한때 꽃이 피고 열매가 익어가던 자리에는 이제 아무 소리도 없다.
그러나 그 침묵은 단순한 공허가 아니다.
누군가의 숨결이 지나간 자리이다.
햇살이 머물다 간 흔적이다.
생명이 머물렀던 시간의 여운이 그 안에 남아 있다.
그래서 빈 들판은 오히려 충만하다.
나는 그곳에서 계절의 죽음을 본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또 다른 시작의 얼굴이기도 하다.
첫서리가 내리는 새벽, 들꽃은 하얗게 덮여가며 그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그 마감 속에서 고요한 순환의 의지를 느낀다.
마치 자연이 스스로의 숨을 멈추어 다음을 준비하는 것처럼.
겨울의 시작은 그렇게 찾아온다.
숨을 참고, 모든 소리를 가라앉히며.
겨울은 외로움의 계절이라 말하지만, 나는 그것이 오히려 ‘기억의 계절’이라 생각한다.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은 그제야 앙상한 본모습을 드러낸다.
화려한 잎사귀가 가린 가지의 골격, 세월의 상처, 오랜 시간을 견뎌온 흔적들이 오롯이 드러난다.
그것은 오래 바라보게 되고,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인간의 마음 또한 그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따뜻한 계절 동안 무엇으로 자신을 꾸며왔던가.
감정의 낙엽들이 모두 떨어지고 나면, 남는 것은 결국 자신이라는 나목(裸木) 하나일 뿐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을 본다.
겨울은 그런 계절이다.
치장 없는 자신과 마주해야 하는 시간.
들판 위를 걷는다.
바람은 이미 날카롭고, 흙은 단단히 얼어 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여전히 미세한 생명의 진동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땅은 쉼 속에서 다음 생을 준비하고 있다.
‘빈 들판엔 지난 계절의 숨결만 머물고’ 그 숨결이야말로 봄을 잉태하는 첫 약속이다.
겨울의 침묵은 그렇게 말을 건넨다.
멈춤 속에서도 생명은 흐르고 있다.
사라짐 속에서도 존재는 계속되고 있다.
나는 종종 계절을 사람의 생애에 비유하곤 한다.
봄은 시작의 숨결, 여름은 생의 확장, 가을은 결실과 되돌아봄, 그리고 겨울은 존재의 응시.
겨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간은 ‘본래의 자신’을 마주한다.
모든 것이 흩어진 자리에, 모든 소음이 멎은 그곳에서만 들리는 내면의 작은 목소리 - 그것이 겨울의 언어다.
그 언어는 말이 아니라 침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나의 계절을 다시 정돈한다.
겨울의 문턱을 넘는다는 것은 단순히 기온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마음이 다른 상태로 건너가는 과정이다.
삶이 쉼으로, 움직임이 고요로, 외향이 내향으로 옮겨가는 길.
그 길에서 사람은 비로소 ‘머무름’을 배운다.
모든 생명이 숨을 죽이고 있을 때, 나는 그 숨죽임 안에서 가장 강렬한 생의 리듬을 느낀다.
바람이 닫은 문 뒤에서, 세상은 쉬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다음 숨을 준비하고 있다.
겨울의 들판에 서서 나는 작은 기도를 드린다.
이 계절의 정적 속에서 나 또한 불필요한 소음을 덜어내고, 다시금 내면의 겨울을 걸어가리라.
바람이 문을 닫고, 서리가 들꽃을 덮듯, 나 또한 지나온 계절의 흔적을 조용히 덮어두리라.
그리고, 숨을 한 줄기 참고서
나는 또 한 번, 내 안의 겨울을 건너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