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에 있는 공터 앞에는 날씨가 좋은 주말이면 벼룩시장이 열리곤 한다. 한 번씩 구경 갈 때면 딱히 살 만한 물건은 없지만 낡고 오래된 것에서 느껴지는 애틋하고 다정한 느낌이 좋아서 또다시 찾게 된다. 대부분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평생토록 간직했던 손때 묻은 골동품들을 바닥에 펼쳐놓고 저렴한 가격에 팔고 계신다. 천천히 걸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빛바랜 파스텔 색의 그릇들이나 조그마한 찻잔에 눈길을 주기도 하고 괜스레 읽지도 않을 독일어로 된 중고 서적을 뒤적이기도 한다.
모든 낡고 오래된 것에는 저마다의 이야기들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미 손님에게 팔린 물건을 손바닥으로 쓱 한번 문질러보고 봉투에 넣어 건네는 그들의 표정에는 이내 아쉬움과 섭섭함이 아른거린다. 그들에게 더이상 필요하지 않지만 차마 버리진 못하고 다른 사람의 손에서 다시금 그 가치를 빛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은 온종일의 하루를 기꺼이 내놓은 것일 테다.
나에게도 이십 년이 훌쩍 넘은 낡은 나무 보석함이 있다. 얼마 전 이사하면서 어디 갔는지 없어지고 말았지만 그 나무 보석함 안에는 아주 조그맣던 나와 기억 언저리에 뭉근하게 남아 있는 다정한 마음이 추억으로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사실 나도 몇 년 전 독일에서 처음 벼룩시장에서 물건을 판 적이 있다. 제이미가 물건들을 팔고 있는 테이블 오른쪽 구석에서 나도 그동안 혼자 끄적거렸던 그림들을 작은 액자에 넣어 가격표를 붙여 올려놓았다. 오후가 되도록 그림은 하나도 팔지 못한 채 친구 옆에 앉아 있는데, 어린 아들과 함께 온 듯한 남자가 내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불현듯 나에게 물었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 남자는 이렇게 말하더니 액자 하나를 집어 들고는 그림 뒤편에 사인을 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언젠가 내가 유명해지면 비싼 돈을 받고 팔겠다며 사람 좋게 씩 웃으면서.
어느덧 해가 저만치 내려앉은 저녁이 되었고 우리는 슬슬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빨간색 뽑기 기계, 미니 룰렛 등 특이한 물건들을 잔뜩 들고 나왔던 제이미는 들고 갈 짐이 확 줄었다며 좋아하다가 정작 하나밖에 팔지 못한 나와 내 그림들을 번갈아 힐끗 보더니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야, 실망하지 마. 이게 끝이 아니잖아.
지금 넌 충분히 잘해나가고 있다고!”
그림 에세이 [나만 그랬던 게 아냐]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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