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의 휴가는 더욱 느리게 - Festigny
밤새 달려 샴페인 (샹판뉴) 지역에 드디어 도착! 운전할 때 얄궂었던 날씨는, 벨기에 국경을 지나 프랑스로 오니 활짝 개었다. 마치 나를 두 손 들어 환영해 주듯.
국경 넘어 두 시간 반 남짓 달렸을까, 드디어 광활한 포도밭이 펼쳐지고 샴페인 지역이 나왔다.
숙소도 전날 겨우 잡은 우리라, 메이저 샴페인 하우스를 제외하곤 하나도 모른 채 그냥 와버렸다.
그래서 그런지 기를 쓰고 구글링 해 찾은 밥집도 장렬히 망하고, 숙소로 가는 길도 잘못 들어 짜증이 날 때쯤 이런 귀여운 설치물을 마주쳤다.
홀린 듯 차를 세우고, 이 주변을 걷자니, 이 동네 꽤 매력 있네?
샴페인 지역 곳곳엔 이렇게 다양한 샴페인 하우스들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발견한 작은 샴페인 하우스,
Champagne Patis-Paille.
4대에 걸쳐 8헥타르정도 되는 포도밭을 직접 가꾸고, 자신의 포도밭에서 나는 포도만을 가지고 집에서 모든 주조 과정을 직접 주관하는, 작지만 옹골찬 샴페인 하우스였다.
결혼이나 기념일 등을 위해 대량 주문을 넣으면 저렇게 커스터마이징 한 에티켓을 가질 수도 있다!
미리 연락도 안 하고 무작정 방문한 덕에 주인아주머니가 많이 당황하셨지만, 친절히 생산 시설도 보여주시고 와인 시음도 무료로 진행해 주셨다.
마셨던 것 중 Brut Tradition (Pinot Mernier 100%, 이 하우스의 시그니처 와인), 그리고 Oris (Pinot Mernier, Pinot Noir, Chardonnay를 1:1:1로 섞고 오크 통을 거쳐 숙성한 멋진 와인), 이렇게 두 병을 샀다.
저렴한 가격에 이런 멋진 샴페인을 마실 수 있다니!! 이 맛에 여기 오나 보다.
이 동네, 진입로까지 너무 예쁘지 않은가!
사실 이 여행을 오기 전, 2주 동안 일본 일주를 했었다. 그때는 퇴사로 인해 마음이 아직도 많이 힘들 때였고, 장시간 비행과 더운 날씨로 인해 컨디션이 너무 나빴다. 그래서 그런가, 이때까지 했던 여행 중 최악이라고 불평도 많이 했고, 오는 길엔 열감기에 중이염까지 걸려 고생을 크게 했었다.
이렇게 맘 놓고 막 다니면 행복한 것을. 굳이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가 내 맘 하나 다스리지 못해 같이 간 식구들과 나 자신을 볶아댔구나 하는 맘에 식구들에게 너무 미안해졌다.
아휴, 이렇게 한번 더 배우는 거지. 더 늙기 전에 배워 다행이다 생각해야지.
만족스러운 첫 샴페인 하우스를 나와 와인밭을 지나숙소를 왔는데, 이건 정말이지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프랑스 시골집 아닌가!
진입로에 차를 몰고 들어가는데, 감사하게도 웃는 낯이 너무 소녀 같으신 주인 할머니가 종종거리며 나와 환영을 해주신다.
이렇게 예쁜 돌담집 전체가 우리가 묵을 곳이라니!! 비엔비 고른 나 칭찬해!
집 안은 에어비앤비 사이트 사진보다 훨씬 좋았다. 오래된 집이라 실제로 보면 후질까 걱정도 했는데, 주인 부부의 감각과 손때가 고스란히 묻어난 소박하고도 멋스러운 곳이었다.
오는 길엔 내일부터 이 지방 잘 나가는 샴페인 하우스는 다 도장 깨기 하자고 다짐했다만, 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마음이 바뀌었다.
몇백 년 넘은 샴페인 하우스들, 다음에 올 때도 거기 있겠지 뭐. 요번 여행은 이 집에서, 샴페인 지역에서 천천히 쉬며 내 멋대로 다녀 보자고.
여기저기 예약하고 바삐 움직이지 말고, 느리게 걷고 깊게 숨을 쉬어 보자고.
근처 동네에서 아무 밥집이나 들어가 소박하지만 맛난 저녁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바로 산책길에 올랐다.
문 앞을 나서자마자 이런 와인밭이 펼쳐진다.
올해 일조량과 강수량이 좋아, 포도가 너무 잘 자라주었다고 한다. 추수까지 5-6주 밖에 남지 않았는데, 남은 기간 동안에도 날씨가 보우하사 좋은 빈티지를 남겨주길, 그래서 몇 년 후 다시 왔을 때 올해 빈티지로 만든 샴페인을 마시며 감탄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천천히 지는 Festigny의 여름 노을. 저 노을처럼 내일도 천천히 아름답게 음미하는 하루로 보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