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녀석의 학교 나의 학교
올해도 늦가을에 어김없이 쌀이 배송되어 왔다.
동봉되어 온 쌀편지를 읽다 보니 내가 과연 이 쌀로 밥을 해 먹어도 될 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매년 그랬지만 올해는 더욱 그랬다.
농사가 잘 되지 않았나 보다.
피사리를 제 때 하지 않고 "괜찮겠지" 놔두었다가 다같이 챌린지를 할 정도로 고생을 많이 했다는
아이들의 편지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게 했다.
최근의 농사 방식과 그간의 변화에 적응하면서도 고민이 많아진다는 쌤의 편지는
나도 같이 고민에 잠기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쌀농사 과정의 순간순간들이 삶을 이끌고 있다는 쌤의 글에 감복했고
이 쌀을 나눌 수 있어 고맙습니다.....라는 마지막 끝인사는
아직도 내가 이 학교와 끈이 닿아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했다.
고등과정까지 다 친다 쳐도 그 녀석이 졸업한 지 십 년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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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십육 년 전...
그 녀석은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지원했던 한 대안학교의 전형에서 떨어졌다.
그것도 초등학교 3년의 기간 동안 방학 때마다 계절학교를 다니며
상당히 친분이 있었던 학교의 전형에서 떨어진 것이다.
뭐 그렇다는 이유로 뽑아주는 건 또 마뜩지 않지만 왠지 모를 자신감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어느 정도 탈락의 경험을 감수하고 넣어보는 대학교 전형도 아니고
중학교 전형에서 떨어진다는 건
단 한 번도 생각하거나 예상해 본 적 없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우리는 그 지역 방향으로는 앞으로 쳐다도 보지 말자며 흥칫뿡을 날렸고
(물론 더 심한 말을 했지만...)
이른 나이에 겪은 실패의 상처를 보듬으며 부랴부랴 다른 학교의 전형을 알아봤었다.
남아있는 전형이 거의 없어 선택지 없이 골라야만 했던 학교.
다행히 주변에서 알아본 평이 좋았고
지각을 했지만 첫 방문이었던 입학설명회 때 느낌이 좋아서 지원을 결정했고
면접에서 당당하게 합격을 하여 입학한 학교.
그 학교를 오랜만에 찾는다.
졸업 이후에도 자주 방문하였지만 코로나 이후로 처음이니 정말 오랜만이다.
이번 쌀편지가 유독 마음에 걸리기도 하였고
매년 열리는 연음제의 소식 문자가 유난히 눈에 들어오기도 하였고
마침 그 주에 전라도로 출장 갈 일이 생겼고
마침 연음제 다음날 동기 학부모 모임이 그 동네에 잡혀 있어
정말 오랜만에 학교를 찾았다.
여느 때처럼 버스를 타고 그 동네의 가장 큰길에 내려 시골길을 걸어 올라갔다.
처음 설명회 때 지각을 하여 헉헉거리며 올라갔던 그 길을
학교 행사며 회의며 학부모 당번이며 수십 번을 걸어 올라갔던 그 길을
(.....아니 백번이 넘을지도 모르겠다.)
그 길을 오랜만에 한걸음 한걸음 꾹꾹 디디며 걸어 올라갔다.
마치 모든 것을 다시 몸으로 담아내고 싶은 듯이
눈으로도 주변 경관을 꾹꾹 눌러 담으며 그렇게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숨이 차서 몇 차례나 쉬고나서야 도착한 작은 학교의 운동장에서는 행사가 한창이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아는 얼굴이 없었다.
반가운 쌤들의 얼굴을 빨리 찾아 뻘쭘한 상태를 벗어나고 싶었다.
다행히 아직도 사슴눈망울을 가진 두 분의 쌤이 그 자리에 그대로 계셨다.
내 마음을 눈치챈 것인지
그날의 손님 중에 가장 오래된 학부모에 대한 예의였는지
행사 내내 나의 좌우에 포진을 하여 어색한 공기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셨다.
신기했다.
지금 저 앞에서 사회를 보고 장기자랑에 참여하며 온전히 이 축제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나보다 한 세대도 더 뒤의 사람들일텐데
어떻게 십여년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아니 그보다 더 활기찬 모습으로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이런 시대에 이 학교를 찾아온 것일까.
어떻게 이런 공동체의 일원이 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일까.
.......신기했다.
하지만 이내 곧 이런 의문도 나의 오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 생각보다 이 사회가 더 건강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자유로워 보였다.
우리 시대와는 다른 발랄함이 있었다.
오랫동안 입학하려는 학생이 없어 학교가 어려웠었는데
이제는 꽤나 안정적이 되었다고 양쪽의 쌤들이 말씀해 주신다.
그렇게 약간의 질투심과 안도감이 공존하는 사이에
눈길을 돌리니 떠들썩한 행사장의 옆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이제는 대표쌤이 되신 두 기수 아래 학생의 아버님이 조용히 난로에 장작을 넣으며 불을 챙기고 계신다.
예전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은 없어지고 사뭇 진지해진 모습에 어색함이 있었으나
조용히 자기 할 일을 하고 계시는 모습에 약간의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난로의 온기와 더불어 변하지 않은 이 운동장의 공기에 잠시 상념에 빠진 사이
행사는 무르익어 모든 상품 추첨을 마치고 마지막 이벤트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제는 그들이 주인공인 학교에 내 자리는 없어 보였다.
행사가 끝나기 전에 자리를 떠야 혼자 쓸쓸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미리 일어섰다.
대표쌤이 뒤늦게 알아보시고 떠나려는 나를 불러 세우셨다.
차를 갖고 오셨냐고...아쉽게도 차가 없는 나는 주시려는 쌀을 못 받았다.
보내주신 쌀로도 모자라 더 나누어 주시려는 마음에 나보다 더 아쉬운 표정을 하셨다.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고
마지막 이벤트인 밴드의 연주와 노랫소리를 뒤로 하고 돌아서는데
오묘한 벅참에 눈물이 차올랐다.
여전히 이 세계가 그대로 있음에 감사하고
여전히 그들의 쌀을 받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다음 쌀을 받았을 때에는 부끄럼없이 밥을 지어먹을 수 있도록
나 또한 내 자리에서 잘 살아보고 있겠다고 다짐을 해본다.
내려오는 길의 청명한 늦가을의 하늘은 역시 이 동네가 최고라는 생각을 하며
청명의 집으로 향한다.
_작년 늦가을의 일기를 뒤늦게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