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고수는 드러내지 않는다.
2~3년 전부터 나도 이러저러한 일을 겪으며 집을 비워 내려고 무던히 노력을 해왔다.
평소에 물건을 잘 안 산다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비워도 비워도 계속 나오는 짐들을 보며 반성을 했고
그렇게 '버리기'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계속 미니멀 라이프에 대한 영상들이 유튜브의 알고리즘으로 떴다.
처음에는 흥미로웠으나 보면 볼수록 사람을 더 지치게 하는 비슷한 내용의 영상들.
똑같은 내용들.
"하얀 침구를 정리하며 시작하는 아침...
나풀거리는 커튼을 열어젖히면 따스한 햇빛이 거실을 비추고
하얗고 이쁜 청소기를 밀면서 청소를 시작하고
또 하얗고 이쁜 물조리개로 화분에 물을 주고 나서
화병에 꽃이 꽂혀 있는 깔끔한 테이블에서
직접 갈아 만든 원두커피나 캡슐커피를 내려 컵에 담고
예쁘게 세팅된 소량의 아침 식사를 한다.
그리고 친환경 수세미로 설거지를 하고 상부장이 없는 깔끔한 주방의 모습으로 끝나는 영상들"
일단 저런 거실과 침실이 있는 집이 있어야겠고
저렇게 하얗고 깔끔한 인테리어의 주방이 있어야겠고
저렇게 하얗고 이쁜 가전제품들이 있어야겠고
대품 정도 되는 화분도 하나 있어야겠고
커피용품도 있어야겠고
...
있어야 할 게 너무나 많이 보이는 것과 동시에 솔직히 부러웠다.
억눌린 질투심으로 미니멀과 거리가 있어 보이는 것들을 자꾸 찾아내는 못된 심보가 발동했다.
자꾸만 본질보다 다른 것들이 눈에 보였다.
못된 심보가 발동하는 비슷한 미니멀 라이프 영상들이 자꾸 알고리즘으로 뜰 때면
나는 자주 그분을 떠올린다.
비움과 환경문제에 있어서 단연코 나에게 길잡이가 되시는 그 분.
소비욕구가 생길 때마다 저절로 떠오르는 얼굴.
그 분은 정말 집에 물건이란 게 없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당연히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들이 그분의 집에는 없다.
예를 들면 '화장실 앞의 발매트' '주방장갑' 같은 것들이다.
나처럼 물건 구입을 자제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전혀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고 생활에 전혀 불편함이 없으신 것이다.
한 번은 그분의 예전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는데 좋은 미역을 챙겨주신다면서
손수건으로 미역을 싸 주셨다.
그렇다.
그 분의 집에는 비닐 한 장이 없었다. 휴지도 없었다.
옷은 계절별로 두 벌씩만 남겨 두어서 옷장이 텅텅 비어 있고
(게다가 본인의 옷은 손빨래를 하신다.)
책은 정확히 3권만 남겨 두고 다 기부하셨다.
나는 진짜 농담으로 "전기는 핸드폰을 충전할 때만 쓰시겠어요!" 했더니
안 그래도 전기를 쓰는 게 싫어서 아침에 태양광으로 충전되는 전지를 햇빛에 놔두고 나갔다가
퇴근하고 돌아오면 그 전지로 핸드폰을 충전하신단다.
그리고, 주방에서 해 먹을 게 있으면 최대한 해가 떠 있을 때 하신다고...
농담을 던졌다가 농구공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다.
더 놀랄만한 에피소드가 굉장히 많지만 더 이상 이야기하면 너무 기인으로 보이실까 봐 이쯤에서 멈춰야겠다.
암튼 그런데 이 분이 지리산 북사면 앞자락에 본인의 집을 지으시겠다고 연락을 하신 것이다.
우리가 처음 인연을 맺었던 그 동네에......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사연이 궁금하기도 했고
그 동네의 대체 어느 땅인지 몹시도 궁금해서 한달음에 현장으로 향했다.
본인보다 다른 가족들을 위해서 집을 짓겠다는 것이었다.
본인은 지금 있는 도시에서 당분간 더 일을 계속하시면서 대출을 받아
다른 가족들을 먼저 귀촌시킨다는 계획이었는데
대출을 받는다 해도 당연히 넉넉지 않은 예산이었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집의 요구사항을 딱 두 가지 말씀하셨다.
방은 3개 그리고 평수는 20평!
원하시는 건 정확히 이 두 가지였다.
오랜 기간 동안 그분의 가치관과 가족과의 삶의 행태는 알고 있었기에 아이디어를 내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그 분의 소비 없는 간소한 생활상을 반영하고
바깥 활동이 많은 시골집의 일상을 고려하고
자연환기를 위해 모든 공간에서 맞통풍이 가능하게 하고
각 공간의 모든 창은 주변 환경에 맞게 일조와 전망을 철저히 고려하고
제일 중요한 공사비가 예산에 맞도록
아주 단순하게... 직사각형의 타이트한 방 3개가 있는 20평짜리 남향집을 설계했다.
그다음 만났을 때 설계안을 보여드렸다.
다행히 굉장히 흡족해하셨다.
놀랍게도 그 집은 그렇게 단 한 번의 설계와 미팅으로 모든 게 결정이 되었다.
그렇다.
이것은 거의 있을 수가 없는 설계과정이다!!!
보통 건축주들은 처음에 설계를 의뢰할 때
"저희는 소박하게 30평의 집을 짓고 싶어요!" 라고 시작을 해도
마지막에는 결국 45평짜리 집이 되어 있거든!
설계안을 발전시키다 보면...
.보조주방이 있으면 좋겠고요
.다용도실은 좀 더 커야 하고요
.게스트룸도 당연히 있어야 하고 별채면 더 좋겠어요.
.화장실은 건식으로 구분되면 좋겠고
.이건 드레스룸이 너무 작네요...
.수납공간도 더 많아야 하는데!
이렇게 원하는 것을 계속 구체화시키다 보면 처음의 30평은 늘 45평이 되곤 하거든!
평생 모은 돈으로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짓는 집인데
충분히 고민하고 변경해 가면서 결정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경제적 여유가 된다면 원하시는 걸 최대한 반영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그분들이 잘못된 게 아니라 그걸 잘 조율해 드리는 게 우리의 일이고 설계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집은 정말 20평으로 시작해서 20평으로 끝났다.
단 한 번의 설계로 설계과정은 끝이 났다.
그리고 공사가 시작된 날 한 가지 더 간곡히 부탁을 하셨다.
공사가 끝날 때까지 본인한테 제발 아무것도 물어보지 말아 달라고...!
네??????
아무것도 물어보지 말라고요? 앞으로 평생 살 집을 짓는 건데 아무것도 물어보지 말라니요?
(사실 이건 긍정적인 의미의 놀람이 아니었다. 내가 이 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본인이 평생 살 집을 짓는 건데 아무것도 물어보지 말라니... 신기함에서 나오는 놀람이었다.)
집이 지어지는 동안 부탁하신 대로 정말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거의 모든 것을 현장 사람들과 내가 의논해서 결정했고
마감에 대한 부분도 전부 우리끼리 결정해서 시공을 했다.
그런데 진짜 너무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는 것이 맞나 싶어서...
마지막 완공될 즈음 딱 한번 질문을 던졌다.
그래도 이건 눈에 보이는 거니까 다른 취향이 있을 수 있을 수 있잖아?
"화장실 타일을 파란색으로 해도 될까요?"
"좋아요~"
(괜히 물어봤......)
그렇게 집이 완공되었다.
공사 중간중간 현장분들과 상의하면서 마감이 조금 달라진 부분이 있었지만
거의 처음 설계한 그대로 지어졌다.
사실 중간에 두 번 정도 현장방문을 하긴 하셨다.
그냥 응원차 방문이었고 어쨌든 완공된 집을 보며
설계안을 받았을 때보다 더 흡족해하셨다.
완공된 집에 들어가 살기 시작하면서는 더더 만족해하셨다.
...
단열(우리 현장분들이 가장 신경 쓰시는)이 잘 되어서 너무 좋고
창문만 열어 놓으면 맞바람이 부는 게 너무 좋고
공간이 부족해서 작게 만들어놓은 세 번째 방도 좋고
어디까지 처마를 빼야 그늘이 적당한지 고민을 거듭해서 만든 툇마루도 너무 좋고
뒷집과 주변 시야에 방해 안되도록 만들어놓은 창문 위치도 너무 좋고
정말 모든 게 너무나 마음에 드신다고!!!
(음...... 생각보다 집에 대한 판단은 굉장히 디테일해... 놀랐어!)
그래... 이번엔 내가 설계를 좀 잘했지!^^ 라고 으쓱하고 싶었으나
그분의 인품을 보면 그 칭찬이 진짜 잘된 설계 때문인건가 의심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공사 과정 중에 주변인과 생긴 문제를 그냥 본인이 전부 손해를 감수하는 것으로 해결했고
가구랑 외부 공사 때문에 초과된 공사비를 한마디 따짐 없이 대출을 더 받아서 해결했고
그 과정에서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한마디 불평도 없었다.
이러한 분이니 그냥 이 집이 지어진 모든 게 감사하신 거지
설계가 잘 되었다고 그렇게 칭찬을 해 준 것일까...
아마 부족한 부분이 있었더라도 절대로 그걸 담아두고 있지도 표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집주인의 성품을 따라가듯이
현장에서는 공사 내내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글을 쓰기 위해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지 못한 게 많을 만큼 즐거운 순간이 많았고
나는 현장에 내려가는 날이 매번 설레었고 내려가 있는 동안 어느 곳에서보다 행복해했다.
아마도 나에게는 이 집이 앞으로도 인생 최고의 현장이 될 것 같다.
공사비의 여유가 없으니 소박하고 소담스럽게 설계하고 지은 시골집이지만
나중에 혹시나 내가 정말 내 맘대로 공사비를 많이 쓸 수 있는 집을 설계하게 되더라도
아마도 이 집은 내 인생 최고의 작품이 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