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의 말] 1부: '악의 평범성'에 관하여
사유한다는 말은 항상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거예요.
조금 부끄럽지만, 한나 아렌트와 관련해서 내가 처음 읽은 책. 1960-70년대에 한나 아렌트의 인터뷰 네 편을 엮은 모음집. 그녀의 책이 워낙 어렵다는 경고가 많아서, 1차 텍스트 중 이 책이 그나마 접근성이 높지 않을까 해서 읽었다.
짧은 소감: 왜 한나 아렌트가 오래도록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아렌트를 더 읽어볼 예정이다. 다음 목표는 [인간의 조건].
욕심을 좀 부리다 보니 책 대부분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두 편으로 나누어서 감상을 적도록 하자. 오늘은 아렌트의 대표적 개념 중 하나인 ’악의 평범성’에 관한 얘기.
나치정권 하의 유대인 학살을 주도적으로 지시한 아이히만은, 오랜 수배 끝에 결국 붙잡혀서 1961년 이스라엘 법정에서 공개재판을 받는다. 그 재판의 리포트인 [예수살렘의 아이히만] 은 아렌트의 대표 저작 중 하나이다.
재판과정에서 사람들이 놀랐던 것중 하나는 아이히만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악당”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그저 일반적인 관료의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아렌트는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한나 아렌트의 말] 한국어 판 서문을 쓴 숭실대 김선욱 교수는 바로 이 용어를 처음 한국어로 번역한 분인데, 서문에서 그는 “banality”의 번역어로 무엇을 써야 할 지 고민했다고 말했다. (‘Banality’는 평범함, 진부함, 낡아빠짐 등의 뜻을 가진 단어이고, 일본의 아렌트 서적에서는 “악의 진부성”으로 번역이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인터뷰를 읽으면 아렌트가 생각하는 “banality of evil”이 무슨 뜻인지 감이 잡힐 것이라고 말한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나는 “악의 평범성”보다 “악의 진부성”이 조금 더 가까운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 한나 아렌트가 얘기하려던 것은 “멍청함”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 자, 오해 중 하나는 이거예요. 사람들은 평범한 것은 아주 흔하다고도 생각해요.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은, 내가 말하려던 바는 그게 아니었어요. 나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아이히만이 있고, 우리 각자는 아이히만과 같은 측면을 갖고 있다는 말을 하려던 게 절대 아니에요. 내가 하려던 말은 오히려 그 반대예요! 나는 내가 누군가를 꾸짖으면 그들이 내가 들어본 적도 없는, 그래서 전혀 흔하지 않은 말을 하는 모습을 완벽하게 상상할 수 있어요. 그러면 나는 “너무 평범해banal”하고 말해요. 아니면 “별로 안 좋아”하고 말하거나요. 그게 내가 말하려던 뜻이에요. (인터뷰 2)
> 평범성banality은 정말로 간과할 수 없는 현상이었어요. 그 현상은 우리가 듣고 또 들었던, 솔직하게 말해서 믿기 힘든 클리셰와 표션 방식들에서 저절로 모습을 드러냈어요. (인터뷰 2)
클리셰적인 변명들로 일관하는 것. 자기는 논리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믿는데, 듣는 사람은 “말도 안 되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말하나?” 할 때가 종종 있다. 아이히만의 증언을 듣고 아렌트가 느꼈던 감정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아렌트가 얘기하는 다음 일화를 듣고, “banality of evil”의 뜻이 확 이해되었다.
> 평범성으로 뜻하려던 바를 설명해줄 이야기를 해드리죠…..전쟁 줒에 에른스트 윙거Erst Junger는 포메라니아에서 소작농 몇 명을 우연히 만났어요. 그런데 스 소작농 중 한 명은 러시아인 전쟁 포로들을 포로수용소로부터 넘겨받아 자기 집에 거둔 사람이었어요. 당연히 그 포로들은 쫄쫄 굶고 있었죠. 러시아인 전쟁 포로들이 이 나라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는 당신도 알 거예요. 소작농은 윙거에게 말했어요. “글쎄, 그놈들은 인간 이하입디다. 소하고 다를 바가 없단 말이오! 그건 쉽게 알 수 있어요. 그놈들은 돼지 먹이를 먹어치우니까요.” 윙거는 이 이야기에 이런 코멘트를 했어요. “독일인들은 때때로 악마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표현은 뭔가 ‘악마적’인 것을 뜻한 게 아니었어요. 봐요, 이 이야기에는 뭔가 터무니없이 멍청한 게 있어요. 멍청한 이야기라는 말이에요. 그 소작농은 굶주린 사람은 누구나 그런 짓을 하리라는 걸 알지 못해요. 그 입장에서는 누구라도 그런 식으로 행동할 텐데요. 이 멍청함에는 정말로 터무니없는 게 있어요.
아이히만은 완벽하게 지적이었지만 이 측면에서는 멍청했어요. 너무도 터무니없이 멍청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평범성이라는 말로 뜻하려던 게 바로 그거예요. 그 사람들 행동에 심오한 의미는 하나도 없어요. 악마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고요!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단순한 심리만 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인터뷰 2)
아렌트가 사실 하고 싶은 말은 “아이히만은 너무 멍청했어요!!!!” 이다. 멍청함이라. 무슨 말을 하는데 “터무니없이 멍청하다”….
조너던 하이트의 [바른 마음] 과 연결지어서 생각하니 이해가 쉬워졌다. 조너던 하이트가 주장하는 도덕 심리학의 첫 번째 원칙은 “직관이 먼저이고, 전략적 추론은 그 다음이다”. 우리는 직관으로 모든 행동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이미 내린다. 의식적 추론은 그 다음에 행해지는데, “마치 대통령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공보관처럼 우리의 모든 입장을 자동적으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바른 마음], 4장).
아이히만은 이미 자신 나름대로의 도덕적 직관으로 수백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아이히만에게 자신의 행동은 “바른 행동”이다: 그의 직관에 따르면. 이제 그는 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하는데, 논리적 추론은 그의 직관을 정당화하는데에 그친다. 당연히 비논리적 논중과 클리셰가 범벅이 될 수밖에 없다. 이성적 판단을 기준으로 본다면 아이히만의 답변은 “진부하고 멍청하다”.
그렇다면, 아이히만 (그리고 전체주의 정권 하에서 폭력을 휘둘렀던 사람들) 은 어떠한 도덕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을까? 얼마나, 어떻게 기준이 왜곡되어야 악마적 행동을 저지를 수 있을까?
[바른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자. 조나단 하이트의 도덕성 기반 이론 (Moral Foundation Theory)에서 인간의 도덕성이 여섯가지 기준으로 이루어져있다고 설명한다 (나중에 [바른 마음] 다시읽기 리뷰도 써야겠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마다 서로 다른 기준을 중요시한다는 것. 예를 들어,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은 배려/피해(care/harm) 기반을 도덕성 판단의 (상대적으로) 주된 기준으로 삼는 반면, 보수적 성향의 사람들은 고귀함/추함(sanctity/degradation)을 상대적으로 중요시한다는 식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전체주의 정권에 충성을 바쳤던 사람들은 충성/배신(loyalty/betrayal)과 권위/무질서(authority/subversion) 기반이 비정상적으로 큰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 “집단을 위해 충성하고 자신을 희생한다”면, “계급질서를 철저히 따르고 윗사람의 지시에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매우 옳은 것이다, 라고 그들은 생각하다. 그것이 타인에게 큰 위해를 끼치거나, 전혀 정의롭지 못하더라도 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러 가지 도덕기반 중 집단의 결속을 위한 의무와 자기조절을 강조하는 결속 기반binding foundation만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충성/배신과 권위/무질서 기반만을 도덕성 기준으로 삼는 개인에게는, 집단의 기준이 개인의 기준이 된다. 아이히만은 집단의 결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개인의 전형적인 예를 보여준다.
> 우리는 어떤 범죄자를 떠올릴 때 범행 동기가 있는 사람을 상상해요. 그런데 아이히만을 살표보면 실제로는 아무 범행 동기가 없었어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범행 동기하고 이해할 만한 게 없었다는 거죠. 그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동조하기를 원했어요. 그는 ‘우리we’라고 말하고 싶어 했는데, ‘나머지 사람들에게 동조하기’와 ‘우리라고 말하고 싶어하기’만드로도 역사상 가장 극악한 범죄가 자행되게 만들기에 충분했죠…..
내가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남들에게 동조하는 것— 많은 사람이 함께 행동하는 데 끼고 싶어 하는 것— 이 권력power을 낳는다는 거에요. 혼자 있을 때는 당신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늘 무력해요. 함께 행동하는 데서 유발되는 이런 권력의 느낌은 그 자체로는 절대로 그릇된 게 아니에요. 그건 인간이 느끼는 일반적인 감정이에요. (인터뷰 2)
> (페스트) ‘맹세oaths’’명령orders’’순종’을 언급하는 뒤편에는 단순한 변명 이상의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나요? 아이히만은 이 단어들을 끝없이 언급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말 잘 듣는 사람으로 양육됐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물었죠. “내가 불복종을 해서 얻을 이득이 뭡니까? 그런 짓이 어떤 점에서 나한테 쓸모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면서 그는 더 이상 그에게 명령이 하달되지 않던 1945년 5월, 세상이 끝장나고 있다는 느낌에 갑자기 압도당했다고 말했습니다.
(아렌트) 지도자 없는 삶! (인터뷰 2)
> (아렌트) 달리 말하면 그들은 그냥 남들에게 동조하고 싶었던 거에요. 그들은 만사에 동조할 준비가 돼 있었어요.
(페스트) 아이히만은 미국인들에게 감금당하자 누군가 다른 사람의 리더십에 복종할 수 있게 돼서 기뻤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법정이나 심문, 예비심문에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할 준비가 돼 있던 그의 기이한 태도는, 아마도 그가 어떤 종류의 권위건 현존하는 권위라면 거기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준비가 돼 있다는 것과 동일하게 해석됩니다. 권위라면 그게 어떤 종류건 실현 가능한 한계까지 순종할 준비가 돼 있었다는 거죠.
(아렌트) 믿기 힘든 일이에요. 그는 예루살렘에서 놀라울 만큼 행복감을 느꼈어요. (인터뷰 2)
영국의 심리마술사 Derren Brown의 쇼 [The Push]를 본적이 있다. “타인에게 동조하는 사람의 본성”을 최대한 이용하면, 그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게끔 만들 수 있을까? 타인동조의 본능은 인류발전의 필수요소였지만, 동시에 인간을 악마로 만들 수도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oFpACkiZ2Q
아이히만 재판과정의 큰 논점중 하나는 역시 “전체주의정권에 동조했다는 것만으로 개인을 처벌할 수 있느냐” 였다. 우리나라의 친일파청산과도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에 대해 아렌트는 다시 한 번 “개인의 독립적인 판단”을 강조한다.
> (아렌트) 그들은 굳이 동조할 것 없이 스스로 결심할 수 있었어요. “고맙습니다만, 당신들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목숨을 거는 짓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우리we’가 아니라 ‘나 I’라고 말하는 것—스스로 판단하는 것을 뜻하는 거예요. 스스로 판단하는 것은 대중의 모든 층위에 속한 사람들이, 세상 모든 곳에서 했던 일이에요. (인터뷰 2)
스스로 판단하는 것. 그것이 언제나 가능한 것일까. 이것이 왜 중요한가. 아렌트는 소크라테스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 내가 보기에 [소크라테스의] 다음 명제가 우리에게 그 이유를 제공하죠.
“자기 자신과 불일치disunity하는 것 보다는 세계 전체와 불일치하는 편이 낫다. 나는 통일체unity니까.”
내가 나 자신과 통일돼 있지 않다면 감당할 수 없는 갈등이 일어나요. 이를테면 그건 도덕 영역에 모순이 있다는 생각인데, 칸트의 정언명령에서 보아도 여전히 타당한 얘기예요. 이 생각의 전제라면 실제 현실에서 내가 자존심을 유지하는 것인데, 이를테면 나 자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며 “나는 이러저러한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하고 말하는 것이에요. 그런 짓을 저지른 누군가와 같이 살길 원치 않치 않으니까요. 내가 이러저러한 짓을 저질렀다면 나한테 남은 유일한 길은 자살이 될 거예요….
> 자존심을 유지한다는 것은 물론 자신에게 말을 건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자신에게 말을 건다는 건 기본적으로 사유를 하는 거예요. 전문적인 사유가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사유를 말하는 거예요. 따라서 이런 생각의 뒤편에 있는 추정은 ‘나는 나 자신과 대화할 수 있다’는 거예요. 내가 세계와 괸장히 심하게 분열해서 나 자신과—어쩌면 친구와, 그리고 다른자아와—대화하는 데 의지하는 것 말고는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들이 있을 수 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가 근사하게 말한 “자기 안의 타인autos allos”처럼 말이에요. 내가 보기에 이것은 무력한 상황이 실제로 어떠할지 모여줘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그냥 뚜벅뚜벅 갈 길을 간 사람들은 자신이 무력하지만 이 명제를 고수한다는 것을, 무력한 누군가도 여전히 사유는 할 수 있다는 명제를 고수한다는 것을 인정한 사람들이죠. (인터뷰 2)
“관료주의적인 조직에 투입된다는 것은 개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요?” 라는 인터뷰어 (요하임 페스트)의 질문에 아렌트는 다음 대답을 남긴다. 현대의 사법 시스템에 관한 인상적인 통찰.
> 관료제는 대량 학살을 행정적으로 자행했고, 그런 상황은 여느 관료제가 그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익명성의 느낌을 창출해냈어요. 개별적인 인간은 사라졌어요. (그런데) 관련된 개인이 판사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는 다시금 인간이 돼요. 이게 실제로 사법 시스템의 대단히 인상적인 측면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진짜 변신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 사람이 “하지만 저는 그저 관료일 뿐이었습니다”하고 말하면 판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잘 들어요. 당신이 여기 있는 이유는 그게 아니오. 당신이 여기에 서 있는 것은 당신이 인간이고 당신이 어떤 짓들을 저질렀기 때문이오.” 이런 변신은 뭔가 대단히 인상적이죠. (인터뷰 2)
아렌트는 왜 아이히만의 ‘멍청함’에 주목했을까? 그는 거대한 악을 저지르는 악인들, 혹은 악의 집단들에게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경외감”을 경계했다. 악인들이 남들과 다른 특별한 사고나 (심지어)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일종의 ‘알리바이’를 준다. 이 독특한 느낌 중 가장 우려되는 것은 패배를 은연중에 합리화하는 감정이다.
> 악마화 자체는…알리바이를 제공해줄 수 있어요. “당신들은 악마의 화신에게 무릎을 꿇었기에 죄가 없다.”…우리가 누군가를 악마로 묘사한다면 우린 스스로를 흥미로운 존재로 보이게끔 만들 뿐 아니라, 남들은 갖지 못한 깊이를 우리 자신에게 몰래 부여할 수 있어요. (인터뷰 2)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집필한 의도 중 하나는 악이 위대하다는 통설을 깨뜨리고, 사람들이 리처드 3세 같은 엄청난 악인들에게 품고 있는 존경심을 사람들에게서 걷어내는 것이었어요. 브레히트에게서 이런 문장을 찾아냈어요. “거물 정치범들은 사람들 앞에, 특히 폭소 앞에 노출시켜야 한다. 그들은 거물 정치범들이 아니라 거대한 정치적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로,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히틀러가 벌인 일들이 실패했다는 게 그가 멍청이였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인터뷰 4)
아렌트가 인용한 브레히트의 다음 문장은 너무 뜻밖이어서 한참을 생각해보게 했다.
> [브레히트]는 그러고는 다음과 같은 갑작스러운 말을 했어요.
비극은 인류가 겪는 고통을 희극이 그러는 것보다 덜 진지한 방식으로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이건 물론 충격적인 발언이에요. 동시에 나는 전적으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정말로 필요한 것은—당신이 이러한 상황에서도 진실성을 유지하고 싶다면—그러한 상황들을 살피던 오랜 방식들을 기억해내고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무슨 일을 하건, 설령 그가 1000만 명을 죽였더라도 그는 여전히 어릿광대다. (인터뷰 4)
브레히트가 옳다. 인류가 겪는 고통은 부조리에서 나온다. 그리고 모든 부조리는 희극이다. 용산에서 불타 숨져간 사람들의 고통, 세월호 아이들의 고통, 그 고통들을 준 가해자들의 어처구니없는 행동들은 영원히 희극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악인을 희화화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영웅시하지도 않았던, 황현산 선생님의 트윗.
잔인함은 약한 자들에게서 나올 때가 많다. 세상에는 울면서 강하게 사는 자가 많다. (황현산, 2016.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