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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랑의 책읽기 Jun 24. 2020

영화 <조커>: 자본주의를 향한 분노를 상품화하다

영화 <조커>

익히 들었던 대로 영화의 짜임새는 훌륭하다.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영화를 압도한다. 그런데 불편하다. 하루 동안 이 불편함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이유를 좀 찾은 것 같다.


이 시대 할리우드 영화들의 주적은 소비에트 공산주의도, 가상의 외계인도 아니다. 바로 자본주의이다. 봉준호는 20년 넘게 그의 영화에 꾸준히 계급비판 메세지를 담아내고 있었는데, 할리우드가 갑자기 화답하니 조금은 어리둥절할 것이다. <조커>도 이 대열에 합류하여 자본주의-계급-불평등에 대한 강한 비판을 녹여낸다. 그런데 이 영화가 메세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너무나 “할리우드적”이다. 단순하고, 짜릿하며, 그만큼 진실을 왜곡한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불법을 저지르는 회사와 싸우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만화 <송곳>에서 “우리는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겁니다” 라는 대사가 나온다. 약자들은 위대하지 않다.  패자들도 저 사악한 승자들만큼이나 자기 잇속을 챙기고 싶어하며, 권력을 잡으면 이를 휘두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다. 경찰에게 목졸려 숨진 George Floyd는 전과8범에 약물중독자이고, Rayshard Brooks는 경찰에게 사살당하기 직전 테이저건을 쏘고 도망쳤다. 하지만 이런 약자들의 시시함이 공권력에 의한, 사회제도로 인한 폭력을 정당화해주지 않는다.


<조커>의 주인공 Arthur Fleck은 고담시 자본주의의 명백한 약자이다. 그런데 그는 “선한 사람”이다.  몸과 마음을 옭아매는 제약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각박한 세상을 살아내려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 그가 평생에 걸쳐 의지했던 사람들—토크쇼 진행자, 직장 동료, 그리고 엄마—들이 하나둘씩 그를 배신한다. 그는 이에 맞서서 “어쩔 수 없이”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하고, 그 와중에 다른 선한 사람들의 영웅, “조커”가 된다. 영화는 그의 불쌍한 사연을 자세하게 서술해주는 반면, 그가 가질 수 있는 “시시함”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조커의 결점으로 보이는 낮은 지능과 정신질환은, 호이킨 피닉스의 신들린 연기에 의해 카리스마 넘치는 (영웅이 갖출 법한) 캐릭터로 만들어진다.


조커를 “선한 Protagonist”로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은 스토리라인 곳곳에 무리수를 낳는다. <조커>에는 언뜻 보면 굉장히 의아한 두 장면이 있다. 첫 번째 장면: 자신의 집에 찾아온 동료를 잔인하게 죽인 조커는, 막상 같이 찾아온 난장이 동료는 곱게 살려줘서 도망치게 만든다. 살인의 유일한 목격자인데도 불구하고. 난장이에게 “너는 나한테 잘해준 유일한 사람이었어” 하는 그의 대사는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가 아니었다면 굉장히 거슬렸을 것이다. 


두 번째 장면이 더 의아하다. 조커는 어느날 밤 자신이 스토킹하던 (그리고 상상 속 연애를 하던) 여자의 방에 무턱대고 들어간다. 여자는 당연히 엄청난 위협을 느끼고, 아이가 있으니 조용히 나가달라고 애원한다. 그런데 조커는 그 말에 순순히 따른다! 이미 살인을 저지르고 폭력의 희열을 경험한 조커인데, 자신이 동경하던 여자가 무방비상태로 있는데도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는다. 감독이 이런 무리수를 두는 이유는 단순하다. 조커가 여자를 강간하기라도 한다면, 메세지는 복잡해지고 관객은 불편해진다.  


요약하자면, 이 영화는 기존 히어로 무비의 단순한 거울이다. 주인공과 악역의 배역만 바뀌었을 뿐, 기존 선악구도를 그대로 따라간다. 현실에 대한 정반대의 왜곡이다. 


<조커>의 왜곡은 <기생충>과 비교해보면 더 두드러진다. <기생충>의 김씨가족은 자본주의 계급사회의 패자이지만, 계급구조 안에서 자신들 혼자 살아남기 위해 강자에게 기생하며 다른 약자를 짓밟는다. 그 시시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기생충>을 보고 찜찜함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정반대의 이유로 <조커>가 불편했다.


그런데 <조커>의 불편함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배트맨 시리즈에서 조커는 무질서를 상징하는 캐릭터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선한 protagonist 인 조커의 행동을 ‘정당화’시켜주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인다. 자신이 동경하던 토크쇼 사회자를 라이브쇼에서 죽이는 장면에서, 영화는 긴 시간을 할애해 조커의 분노를 보여주며 이 살인의 정당성을 키워준다. 그런데 그 이유라는 것은, 철저하게 조커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 (너는 나를 대중 앞에서 모욕했어) 이다. 개인의 주관적 판단이 그가 행하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사회라면, 인종차별, 동성애차별, 심지어 <조커>가 열심히 비판하는 자본주의 계급차별 역시 정당화될 수 있다. RogerEbert.com 의 평론가 Glenn Kenny가 “사회비판영화로서, <조커>는 해로운 쓰레기”라고 말한 것에 동의한다. <조커>는 자본주의 문화상품이 자본주의에 대한 분노를 다루는 가장 안 좋은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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