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다시 읽기: 자본주의에 대하여 (2)
지난 글에 이어서 [사피엔스] 자본주의 이야기. 오늘은 ‘신용’을 다룬 16장에 대한 기록이다.
“화폐”는 사피엔스가 만들어 낸 이야기(coordination)의 최고봉 중 하나로서, 가치의 교환과 저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근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신용”이라는 coordination은, 화폐에 숨겨져 있던 잠재력을 꺼내 사피엔스의 경제활동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신용”이 무엇인가? 미래의 가치를 담보로 현재의 가치를 주는 행위이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이 얘기는 현대사에서 혁명적 역할을 담당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돈은 무수히 많은 것들을 대표할 수 있고 무엇이든 다른 거의 모든 것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에 대단한 존재이다. 하지만 근대 이전에는 이 능력이 제한적이었다.... [새로운] 방법은 근대에 이르러서야 발견되었다. 미래에 대한 신뢰를 기초로 한 새로운 시스템이 등장한 것이다. 이 시스템 내에서 사람들은 ‘신용’이라 불리는 특별한 종류의 돈이 상상 속의 재화—현재 존재하지 않는 재화—를 대표하게 하는 데 동의했다. 신용은 미래를 비용으로 삼아 현재를 건설할 수 있게 해준다. (16장)
신용이라는 이야기의 어떤 성격이 인류의 폭발적 성장을 이끌어냈는가? 사피엔스 역사에서 살아남은 이야기들은 물론 사피엔스에게 효용을 주었다. 많은 경우, 이야기들은 더 많은 사피엔스들이 참여함으로서 그 효용이 커진다. 공간축으로의 확장이다.
그런데 신용은 여기에 “시간축으로의 확장”이 더해진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미래를 보고 신용을 준다. 차원이 하나 더해지니, 그 파급력은 기하급수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신용이라는 이야기에는 미래에 대한 신뢰가 필수적이다. 미래에 대한 신뢰, 곧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세상이 될 거야”라는 낙관주의는 과학기술의 발전에서 온다. 한 번 신뢰가 구축되기 시작하면, 신용은 선순환의 고리를 그리며 증가한다. 모든 것은 결국 생산성에서 결정되며, 생산성의 증가는 기술의 발전에서 온다.
지난 5백년 간 진보라는 아이디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를 점점 더 신뢰하게 만들었다. 신뢰는 신용을 창조했고, 신용은 현실 경제를 성장시켰으며, 성장은 미래에 대한 신뢰를 강화하고 더 많은 신용을 향한 길을 열었다. (16장)
근대 경제사를 알기 위해서 정말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단어는 하나밖에 없다. ‘성장(growth)’이란 단어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근대 경제는 마치 호르몬이 넘쳐나는 십대처럼 성장해왔다. (16장)
“신용”이라는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옥의 티는, 사피엔스의 지적능력으로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데에 있다. 사피엔스의 감각기관은 ‘지금 여기’의 정보만을 받아들이는데, 신용이라는 coordination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요구한다.
사피엔스는 미래를 예측하는 데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뛰어나지 않다. 그들은 중요한 두 가지 실수를 종종 저지른다. 첫째, 사피엔스는 “현재에 일어났던 일이 미래에도 그대로 일어날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이 선형적 사고에 대해서는 조던 엘렌버그가 [틀리지 않는 법]에서 탁월하게 설명했다. 둘째, 수많은 행동경제학 연구결과들이 알려주는 것처럼, 사피엔스 마음 속에는 미래의 가치보다 현재의 가치를 더 높게 보려는 충동이 존재한다.
“거시경제학을 30분 안에 요약하기”라는 불가능해보이는 일을 해낸 Ray Dalio의 비디오 클립 역시 신용이 현대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한다. 위에서 말했던 사람들의 불완전한 미래예측은 결국 신용 전체의 양을 요동치게 만들고, 경제불황 사이클의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는 얘기. 시간 있을 때 꼭 챙겨보길 권한다.
화폐와 신용이라는 강력한 coordination들을 바탕으로, 자유시장경제는 현대사회의 가장 주요한 시스템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그에 따라 자유시장경제가 미치는 해악도 선명해졌고, 이에 대한 불안감과 분노도 높아진다.
자유시장 지본주의는 이윤이 공정한 방식으로 얻어지거나 공정한 방식으로 분배되도록 보장하지 못한다. 그렇기는커녕, 이윤과 생산량을 늘리려는 갈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성장이 최고의 선이 되고 다른 윤리적 고려에 의한 제약을 받지 않을 때, 그 성장은 쉽사리 파국으로 치닫는다. (16장)
유발 하라리는 자본주의의 결함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우리에게 익숙한 “불평등”의 문제. 화폐와 신용을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는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부를 만들어냈지만, 그 부를 분배하는 데에는 무능력하다. 승자와 패자의 차이는 너무 극심해서 패자들의 삶은 자본주의 이전보다 더 악화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불평등에 대해서 분노하는 사람들을 보며, 자본주의 옹호자들은 “그래도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는 경제 전체의 파이를 키워내는 것에는 뛰어나다. 결국에는 모든 사람이 커진 파이의 혜택을 입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두 번째 결함은 “이윤이 공정한 방식으로 얻어지”는 것을 보장하지 못함에 있다. 가장 많은 부를 창출해내는 사람이 승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불공정한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제거한 사람이 성공함으로써, 경제 전체의 파이가 커지는 것을 막는다. 이명박 시절에 사람들은 “사기꾼이 정권을 잡아도 경제만 살리면 된다”고 말했는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전혀 논리가 맞지 않는 말이다. 사기꾼은 자유시장경제를 망치는 주범이다.
심지어 공정한 방식으로 경쟁에서 승리하더라도, 한번 패자를 제거하고 시장의 유일한 플레이어가 되면, 독점의 과실에 취해 예전의 혁신성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21세기 초의 인터넷 기업은 100년 전 Gilded Age를 연상케 하는 독점체제를 구축해 나가는데, 앞으로 경쟁정책의 담론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 지 궁금해진다.
유발 하라리는 자본주의가 일으켰던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아메리카로 끌려간 아프리카 노예 얘기를 꺼낸다. 이 이야기는 황현산 선생님이 생전 그의 칼럼에서 인용하기도 했었다.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약 1천만 명의 아프리카 노예가 아메리카로 수입되었다. 이 중 약 70퍼센트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 노동 환경은 끔찍했다. 대부분의 노예는 짧고 비참한 삶을 살았다. 그 외에도 노예를 포획하기 위한 전쟁이나 아프리카 내륙에서 아메리카 연안으로 노예들을 옮기는 과정에서 수백만 명이 추가로 사망했다. (16장)
이 대목에서, 내가 3년 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가장 기억에 남았던 문장이 나온다.
기독교나 나치즘 같은 종교는 불타는 증오심 때문에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 자본주의는 차가운 무관심과 탐욕 때문에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 (16장)
유발 하라리의 자본주의에 관한 냉철한 평가를 인용하면서 기록을 마친다.
2014년의 경제적 파이는 1500년보다 크지만, 분배는 너무나 불공평해서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한 아프리카의 농부와 인도네시아의 노동자가 집에 가져오는 식량은 5백 년 전보다 더 적다. 농업혁명과 마찬가지로, 현대 경제의 성장은 거대한 사기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인류와 세계 경제는 성장을 거듭했을지라도 기아와 궁핍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더욱 많아졌는지도 모른다. (16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