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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랑의 책읽기 Feb 02. 2020

"화폐"는 사피엔스가 만들어 낸 가장 강력한 이야기

[사피엔스] 다시 읽기: 자본주의에 관하여 (1)

[사피엔스] 다시 읽기, 이번엔 자본주의를 다룬 10장과 16장을 기록해 본다. 유발 하라리가 설명하는 자본주의의 기원은 다른 어떤 경제학자의 글보다 명쾌하다.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근현대 자본주의를 만들어 낸 두 개의 핵심적 ‘이야기’는 바로 “화폐”와 “신용”이다. 


쓰다 보니 글이 길어져서, 오늘은 “화폐”를 다룬 10장에 대한 기록.


화폐는 매우 복잡하면서 또 매우 단순한 가상의 이야기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겠지만, 현재 나의 전 재산은 컴퓨터에 나타나는 숫자 속에만 존재한다. 100년 전에는 모든 가치가 금속 덩어리 혹은 종이 다발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금속, 종이, bit 등등에 우리의 가치를 저장하고 이에 대해 안심할 수 있는 것일까? 


사피엔스 무리가 같은 종류의 행동을 하는 것 (coordination) 은 ‘상대방도 같은 행동을 할 것이라는’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들이 만들어내는 ‘가상의 이야기’들은 신뢰를 확보하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그리고 화폐는 유발 하라리가 강조하는 허구의 이야기 중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혹은 왜 우리는 겨우 색칠한 종이 몇 장을 받자고 기꺼이 햄버거를 뒤집고, 보험을 팔고, 못된 아이 세 명을 봐주는가?

사람들이 기꺼이 그런 일을 하려 드는 것은 자신들의 집단적 상상의 산물을 믿기 때문이다. 신뢰는 온갖 유형의 돈을 주조하는 데 쓰이는 원자재다.... 화폐란 상호신뢰 시스템의 일종이지만, 그저 그런 상호신뢰 시스템이 아니라 인간이 고안한 것 중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효율적인 상호신뢰 시스템이다.

이런 신뢰를 창조한 것은 정치, 사회, 경제적 관계의 매우 복잡하고 장기적인 네트워크다. 나는 왜 별보배고둥 껍데기나 금화나 달러화를 신뢰할까? 내 이웃들이 그것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이웃들이 그것을 신뢰하는 이유는 내가 그것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10장)


그런데 왜 ‘화폐’라는 이야기는 이렇게 전 세계로 뻗어나갔을까? 사피엔스는 그동안 수많은 종류의 이야기를 만들어왔을 테고, 그중 대부분은 소멸되었을 텐데,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는 이야기들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을까?


나의 가설: 강력한 이야기는 복잡하면서도 단순해야 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1) “풍부하고 복잡한 이야기 그물망”이 존재해야 하고, 동시에 (2) “단순한 행동지침”을 가져야 한다.


화폐를 예로 들어 보자. 화폐가 가치를 가지려면 모든 사람이 화폐에 대한 신뢰를 공유해야 한다.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대로 “이런 신뢰를 창조한 것은 정치, 사회, 경제적 관계의 매우 복잡하고 장기적인 네트워크”이다. 화폐를 “지켜주는” 왕 혹은 민주주의 정부, 금융 시스템이라는 허구적 구조, 허위로 남의 가치를 탐하는 자들을 처벌하는 공동체에 대한 넓고 복잡한 이야기들이 화폐에 대한 굳건한 신뢰를 만들어낸다. “지금 당신이 들고 있는 5만 원 지폐는 가치가 전혀 없어요”라는 사실을 설득시키려면 (신뢰를 깨려면) 그 전에 논박해야 할 이야기들이 참 많다. 


하지만 동시에, 강력한 이야기들은 사피엔스의 지적능력으로 이해하기 수월한 행동지침을 갖추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화폐 (그리고 일반시장경제)의 가장 강력한 힘은 ‘모든 가치를 1차원의 숫자로 변환’하는 데에서 나온다. 숫자가 높으면 가치가 높아지고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다. 숫자가 낮아지면 정반대가 된다. 이 이야기는 너무나 단순해서 인간의 유전자가 별다른 교육 없이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자유시장론자들이 자유시장을 “자연스러운 사회시스템”으로 착각할 만하다). 


일단 화폐에 대한 신뢰가 확보되면, 그 매개체는 무엇이 되든 사실 상관없다. 다음은 [블록체인 제국주의]에서도 인용한 바 있는, 아우슈비츠에서의 담배화폐 이야기.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한 사람은 수용소에서 사용된 담배 화폐를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화폐가 있었고 누구도 그 가치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것은 담배였다. 모든 물품의 가격은 담배로 제시되었다. ‘평상’시, 그러니까 가스실에 입장할 후보들이 정기적으로 계속 들어오는 기간에는 빵 한 덩이는 담배 열두 개비 값이었다. 3백 그램짜리 마가린 덩어리는 30개비, 시계는 80~2백 개비, 알코올 1리터는 4백 개비였다.” (10장)



돈에 대한 믿음은 사피엔스들을 평등하게 연결하지만, 그들이 쌓아 온 다른 이야기들을 무너뜨릴 위험이 있다.


화폐라는 가상의 상징, 이에 대한 신뢰는 현대사회에 완전히 뿌리깊게 박혀 있다.  자연적으로, 화폐와 자유시장이라는 시스템은 사피엔스가 다른 종류의 이야기를 접할 때에도 영향을 미친다. 유발 하라리는 긍정적인 면 한 가지, 부정적인 면 한 가지를 언급한다. 먼저 긍정적인 면: 돈은 개방적이고 유연하며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한다. 정말 그렇다고? 


서로의 신앙에 동의할 수 없는 기독교인과 무슬림은 돈에 대한 믿음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종교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믿으라고 요구하는 반면에, 돈은 다른 사람들이 뭔가를 믿는다는 사실을 믿으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철학자와 사상가와 예언자는 수천 년에 걸쳐 돈을 흉보면서 돈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매도했다.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한편 돈은 인류가 지닌 관용성의 정점이다. 돈은 언어나 국법, 문화코드, 종교 신앙, 사회적 관습보다 더욱 마음이 열려 있다. 인간이 창조한 신뢰 시스템 중 유일하게 거의 모든 문화적 간극을 메울 수 있다. 종교나 사회적 성별, 인종, 연령, 성적 지향을 근거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유일한 신뢰 시스템이기도 하다. 돈 덕분에 서로 알지도 못하고 심지어 신뢰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효율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 (10장)


작년에 읽었던 요리스 라위언데이크의 [상어와 헤엄치기]가 생각난다. 런던 금융시장 (시티)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인류학적 보고서였던 이 책에서 기억에 남는 한 장면: 자기 커리어에 자부심을 가지는 Investment Banker들이 되풀이했던 말은 “시티는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였다. 흑인 이민자 출신이든, 아시아계 여성이든, ‘회사에 수입을 많이 가져다줄 수 있기만 하면’ 이 바닥에서 인정받고 잘 나갈 수 있다. 모든 가치를 1차원의 숫자로 환산하는 작업에 내포되어있는 도덕적 선이랄까. 


하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화폐-시장경제 시스템은 우리가 쌓아온 다른 신뢰시스템을 무너뜨릴 위험이 있다.


모든 것이 변환 가능할 때, 그리고 신뢰의 기반이 익명의 동전과 별보배고둥일 때, 돈은 지역전통, 친밀한 관계, 인간의 가치를 부식시키고 이를 수요와 공급의 냉정한 법칙으로 대체한다.... 우리는 이방인이나 이웃집 사람을 신뢰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지닌 주화를 신뢰할 뿐이다. 그들에게서 주화가 떨어지면 우리의 신뢰도 사라진다. 돈이 공동체, 신앙, 국가라는 댐을 무너뜨리면, 세상은 하나의 크고 비정한 시장이 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경제사는 미묘한 춤과 같다. 사람들은 이방인과의 수월한 협력을 위해서 돈에 의존하지만, 그것이 인간적 가치와 친밀한 관계를 손상시킬까 봐 두려워한다. (10장)


유발 하라리의 결론이 맘에 든다. 화폐-시장경제 이야기와 다른 공동체의 이야기들은 서로 미묘한 춤을 춘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모든 이야기들은 물론 강력하다. 동시에 어느 이야기들도 완전하지 않다. 서로 상충되는 이야기들이 맞부딪치면서, 서로의 부조리를 드러내보이고, 서로를 변화시켜 나간다. 21세기에는 자유시장의 이야기가 다른 모든 이야기를 잡아먹을 것만 같다. 많은 공동체들이 시장으로 변하고, 모든 사람들은 효율성을 외친다. 하지만 긴 역사의 흐름으로 본다면 다른 공동체의 이야기들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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