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 제국주의], 한중섭
장점과 단점이 모두 많은 책이다. 우선 장점부터 얘기하자. 가장 큰 장점: 재미있다! 저자의 경쾌한 문장들에 빠져서 정신없이 읽었다. 저자의 넓은 지적 호기심과 그를 뒷받침하는 다양한 레퍼런스들 (유발 하라리-한병철-레이첼 보츠먼으로 이어지는)에 감탄이 나온다. IT 신기술이 미칠 영향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예측하는 작업을 하는 작가가 우리나라에 얼마나 있을까 싶다. 이 저자를 발굴해서 책을 맡긴 <북저널리즘>에게도 칭찬을 주고 싶다.
저자 한중섭의 브런치: 구독해야겠다.
자, 좋은 얘기는 여기까지.
이 책의 중심 생각은 다음 두 문장으로 요약된다.
> 우리가 정보를 주고받는 TCP/IP 기반의 인터넷이 정보의 인터넷이라면 이중 지불 문제를 방지하는 블록체인은 중개 기관 없이 돈을 주고받을 수 있는 가치의 인터넷이라 할 수 있다. (p.11)
1990년대 인터넷의 등장, 2010년대 모바일 인터넷 기기의 등장은 우리가 정보를 소비하는 속도와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아날로그 세상에 존재했던 산업 중 상당수—언론, 오락, 물류, 교통, 여행—들이 인터넷에 의해 재편되거나 아예 사라지고 있다. 블록체인이 미칠 영향력의 크기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저자는 1990년대 인터넷 초기 그 영향력을 실감하지 못했던 시절을 떠올려보라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블록체인과 이를 이용한 디지털 화폐-자산은 현존하는 금융시장의 구조를 완전히 바꿔놓을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가치를 교환하는 방식”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주장.
초기 인터넷의 선구자들은 인터넷이 가지고 있는 탈집중적 정보교환 방식에 열광했다. 그들은 대중이 인터넷을 이용함으로써 좀 더 평등한 사회, 권력에 힘에 덜 지배당하는 사회가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저자에 의하면) 현실은 정반대. 소수의 인터넷 기업이 모든 정보의 길목을 가로막고 있고, 그 기업들은 모두 미국 혹은 중국 정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정보가 통제당하면서 권력의 쏠림현상이 더욱 심화되었다.
> 미국과 중국의 디지털 제국이 장악하고 있는 인터넷은 국가별로 차이는 있지만 본질은 같다. 한때 투명성을 지향했던 인터넷이 감시와 통제가 만연한 디지털 판옵티콘으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p.69)
저자는 블록체인-디지털 화폐도 같은 전철을 밟을 것이라 예상한다. 블록체인의 탈중앙화 성격은 말 그대로 이론적 환상일 뿐, 결국에는 제국들—미국과 중국—이 가치교환의 정보까지 통제하게 되고, 따라서 더욱 강력해지는 제국들의 지배 수단으로 전락할 것이다.
> 비트코인 열풍으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것은 개인이나 기업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국가, 그중에서도 미국과 중국이다. 일찍이 중국은 비트코인 채굴 및 거래소 생태계를 장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 세계 블록체인 산업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미국은 글로벌 기업들을 앞세워 비트코인 도박판의 규칙을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설계하고 있다. (p.15)
>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비트코인의 등장으로 인해 디지털 제국주의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고 생각한다…. 비트코인에 기반한 디지털 화폐들이 대중화될수록 미국의 감시 범위는 확장된다. 미국이 자국의 인터넷 기업들을 활용해 전 세계 정보의 흐름을 감시했던 것처럼 돈의 흐름마저 감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pp.208-209)
저자의 논리는 단순하고 명확하다. “블록체인은 금융시장을 뒤집어놓을 것이며, 그 파워는 제국들에게 종속된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큰 질문이 남는다. “블록체인이 정말 세상을 뒤집어놓을 것인가?” 저자는 여러 예측들을 내놓고 있지만, 결국 가장 큰 설득 포인트는 인터넷이다. “인터넷을 보라. 이렇게 세상을 바꾸어놓았지 않는가? 블록체인도 같은 길을 걸을 것이다”. 아쉬운 지점이다.
이 부분에서 저자의 확고한 신념은 독자를 설득시키는데 오히려 장애가 된다. 첫 번째, 저자는 블록체인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으로 보는 반대편의 입장을 충실히 전달하지 않는다. 책 전체를 통틀어서, ‘금에 비교해서 비트코인이 자산으로서 가지는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쪽에 대한 2페이지 정도의 반론이 전부이다. 이 책의 핵심 메시지인 금융시장의 혁명적 변화에 대해서 비관적 예측을 하는 입장을 충실히 실어주었다면 책이 더 균형 잡혔을 것이다.
두 번째로, 블록체인의 미래를 확신하는 저자는 자신의 담론을 좀 지나칠 정도로 거대하게 쌓아 올렸다. 강대국들이 블록체인 기술을 독점할 것이라는 예측은 신선하다. 하지만 “블록체인”이 주제인 이 책에서 블록체인의 기술적 성격보다 제국주의의 역사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것은 조금 과도하다. 덧붙여서, 제국주의를 서술하는 대목에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의 많은 문장을 인용없이 따온 것은 좀 강하게 비판하고 싶다. 저자가 앞으로 더 좋은 글을 쓰고 싶다면 표절의 경계를 넘나드는 버릇은 꼭 고쳐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수많은 새로운 질문들이 생긴다. 이 책의 주장들이 도발적이고 새롭다는 증거일 것이다. 최소한 이 책은 나에게 블록체인을 진지하게 알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해 주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이 책에 아쉬운 점: 수많은 인문학 레퍼런스에 비교해서, 블록체인 기술 자체에 대한 레퍼런스가 전혀 없다. 최소한 “더 읽을 책들” 같이 도움이 되는 책들 목록이라도 만들어줬으면 좋았을 텐데. 결국 내가 알아서 아마존을 검색한 결과, [Blockchain Bubble or Revolution] 과 [Blockchain Basics] 이 두 책이 평이 좋아서 바로 주문했다.
블록체인에 대해 더 공부해서, 다음 질문에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다음은 저자의 말.
> 나는 탈중앙화라는 블록체인의 이상이 다소 순진하다고 생각하는데, 탈중앙화는 과거에도 실패했고 앞으로도 결코 실현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p.104)
하지만,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바로는, 탈중앙화는 “블록체인”을 정의하는 대표적 성질 아닌가? 탈중앙화로 정보를 암호화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디지털 화폐의 채굴산업을 개인이 아닌 몇몇 기업이 독점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탈중앙화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만큼 디지털 화폐의 신뢰도는 떨어지는 것 아닌가?
다시 말하면, (1) 정보의 독점과 (2) 정보교환시스템의 신뢰도는 반비례할 것 같은데, 정부가 블록체인을 독점한다면 (2)가 떨어져서 결국 화폐로서의 기능을 못하게 되는 것 아닌가?
위에 덧붙여, 내가 알고 있는 블록체인의 또 다른 한계는 “느린 거래속도”이다. 다시 말해, 이상적인 블록체인 기술은 (1) 정보의 탈 중앙화; (2) 높은 안정성; (3) 빠른 거래속도를 동시에 이룩해야 한다. 현재 기술이 이를 모두 달성 가능한가? 언젠가는 달성할 수 있는 것인가?
블록체인이 위의 한계를 다 극복할 수 있다고 가정하자. 이제 두 번째 큰 질문: 블록체인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더 좋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 실생활에서 비트코인의 가치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비교적 운이 좋은 편이다. 이들은 튼튼한 경제, 투명한 정치 사회 구조, 시민의 사유 재산권, 안정적인 치안이 보장된 비교적 괜찮은 국가에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지구촌 모든 사람들이 이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는 않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p.119)
오케이, 베네수엘라에서 비트코인의 효용이 굉장히 높은 것은 알겠다. 하지만 저자의 저 말을 뒤집어보면 다음과 같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비트코인의 효용이 그렇게 크지 않다.” 한국과 다른 선진국들은, 수많은 경제위기를 거치면서도 기존 화폐의 신뢰도가 크게 낮아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카카오 뱅크같이 기존 화폐를 이용한 핀테크가 성행한다면, 거기에 블록체인 기술이 끼어들 여지가 존재하는가? 여기에 끼어드는 또 하나의 질문: 금융시장 밖에서 블록체인기술은 얼마나 유용한가?
조만간 이 곳에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답변해줄 수 있다면 물론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