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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랑의 책읽기 Feb 11. 2020

김초엽의 매력적인 실험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주변에서 많은 얘기가 들려서, 언젠가 한 번은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책. 기대를 충족시켜줘서 기쁘다.



좋은 SF는 정교한 실험실이다.


나는 정교한 사고실험으로서의 서사를 좋아한다. 다양한 인간성을 가지는 캐릭터들을 생경한 환경에 넣고,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지켜보는 과정에서 낯설음과 깨달음을 얻게 되는 행위. 이 점에서 SF는 일반적인 소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SF가 그리는 세계는 지금 우리들의 시선으로는 “인간적이지 않은” 세계이다. 인간적이지 않은 세계에 인간들을 집어넣음으로서, SF는 인간 일반에 대한 고찰을 하게 도와준다.


이 사고실험의 정점에 테드 창의 단편들이 있다. 그의 첫 단편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 는 내 인생의 책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나 <지옥은 신의 부재> 등의 단편 한 편씩을 끝낼 때마다 느꼈던 떨림이 지금도 생생하다.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 그 실험실과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의 절묘한 맞물림에 대해서는 테드 창에 필적할 사람은 찾기 힘들 것 같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읽고 SF라는 장르에 매력을 느껴 다른 사람들의 작품들을 여럿 찾아봤다. 아직 테드 창을 넘어서는 작품은 찾지 못했지만, 그동안 아주 좋은 한국 SF작가를 둘 발견했다. 바로 김보영과 이번에 읽은 김초엽이다. 오늘은 김초엽에 대해 (최대한 스포일러를 섞지 말고) 얘기해보자. 



김초엽의 실험실은 매력적이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김초엽이 그리는 세계는 매력적이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 주인공이 태어나는 완전무결해보이는 마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우주 정류장은 아득하다. <스펙트럼>에서 외계인들이 쓰는 언어의 새로움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연상된다.  <공생 가설>에서 과학자들이 아이들이 내는 소리를 읽는 대목에서는 순간 전율을 느꼈다.


책의 마지막 두 단편 <관내분실>과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에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주인공과 화자는 모두 여성이다. 이 여성성은 두 단편이 가지고 있는 메세지의 중심축을 이룬다. 김보영의 걸작 중편 <얼마나 닮았는가>가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내가 발견한 좋은 한국 SF작가 두 명이 모두 여성이고, 그들의 작품 중 내가 인상깊게 읽은 작품들이 여성성을 주제로 하고 있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그런데 김초엽의 소설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소설의 세계(실험실)와 작가가 전달하고 싶은 메세지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지 않는 부분이다. 마지막 두 단편을 (어쩔 수 없이 스포일러를 조금 섞어서) 예로 들어보자. <나의 우주 영웅에 대하여>에서 여성 우주여행사였던 이모를 동경했던 주인공 화자는 그 자신 또한 우주인에 선발되어 웜홀 너머의 세계에 도전한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우려와 견제의 시선을 받는다.  작가의 “유리천장”이라는 메세지는 분명하게 전달되고, 웜홀 통과를 위한 우주인이 되는 훈련은 흥미롭다. 하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매끄럽지 못하다. “여기서도 유리천장은 여전하겠구나”정도의 탄식만 나올 뿐, 소설의 실험실이 꼭 필요했는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존재한다. <관내분실>의 의식저장장치에 대해서도 비슷한 아쉬움이 남는다. 김초엽의 단편들은 중반까지 흥미롭게 진행되다가 갑자기 끝나버리고 마는 인상을 주는데, 아마도 이는 김초엽의 실험실과 그가 전달하려는 메세지 사이의 괴리가 주는 영향일 것이다.


하지만 김초엽의 이야기들은 아쉬운 점보다 매혹적인 부분이 더 많다. 앞으로 그의 발전을 응원한다. 책도 꼬박꼬박 사서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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