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흡혈의 세계
지금은 12시 5분. 이제 6분이 되려 하고 있습니다. 일초 이초 삼초. 6분이 되었습니다
나의 어깨는 항상 활처럼 구부정합니다. 모니터를 응시하고 아무 생각 없이 손가락만 놀리고 있습니다. 손가락 끝이 돌아다닙니다. 마우스가 글자를 가려도 상관이 없습니다. 글을 쓰지만 글을 읽지는 않습니다. 아예 가끔은 천장을 바라보면서 쓰기도 합니다. 지금 사무실 천장에는 형광등이 두개나 달려있습니다. 무슨 자연의 빛과 열을 발하는 형광등이라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나는 항상 실내에서 일을 해도 얼굴이 탑니다.
그런데 이 때! 모기가 욍알욍알 무어라고 자꾸 찝쩍댑니다. 속으로 '얼른 배나 채워라' 라고 되뇝니다. '얼른 배를 채워 환하고 깨끗한 벽지에 착지하여라. 편히 휴식을 취하고 있을 그 때, 내 너에게 영원한 휴식을 주리라.'. 흐뭇한 상상을 하며 그녀가 머물고 간 흔적을 긁습니다. '아 간지럽다.'
나의 의자의 본래 주인은 키가 170은 되던 여성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156밖에 되지 않는 나는 사이즈가 맞지 않는 의자가 불편합니다. 목에 있어야 할 목 받침대가 늘 뒤통수 한가운데에서 머리를 밀어댑니다. 거북목제조기. 그래서인지 내 목은 3년 전보다 더 짧아져버렸습니다. 모기는 가까스로 그 짧아져버린 뒷목에 흔적을 남겼고 나는 그것을 틈틈이 긁어 그와 비슷한 흔적을 여러 개 더 남겼습니다. 덕분에 뒷목의 피부결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봉숭아물이 든 손가락이 자판 위를 돌아다닙니다. 당최 무슨 생각으로 돌아다니는지 모르겠습니다. 봉숭아 물을 들인 뇌가 손끝에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던 그 때 누군가가 사무실로 다가오려다 발걸음을 멈춥니다. 누굴까? 12시 14분입니다. 늦은 시각 누굴까. 차마 큰소리로 부르지 못하고 상상만 합니다. 오늘 시험을 못 본 K양인가. 요즘 불면증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또 다른 K양인가. 멈춘 발걸음소리가 뒤를 돌아 멀어집니다. 누군가 나와 같이 늦은 밤 끝도 없는 생각으로 잠을 못 이루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오줌이 마려운것일까? 나는 물소리가 날 때 까지 귀를 기울입니다. 2분이 더 흐르고 난 지금도 물소리가 없는 것을 보면 둘 중 하나겠지만 둘 다 큰 일일 것 같습니다.
글을 쓸 때는 늘 음악을 듣습니다. 요즘은 '프롬'의 노래를 들으며 썼습니다. 첫 번째 과제는 '봄맞이 가출'을, 두 번째 과제는 '낮달'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인도음악을 듣고 있습니다. 지금 흐르는 음악은 'Main Fakir Mera Yaar Fakira'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일까요. ‘메인 파키르 메라 얄 파키라?’ 알게 뭐야. 사정없이 꺾어대는 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인도음악은 나에게 '될대로 되라지.'라는 느낌을 줍니다. 짧은 목을 좌우로 마구 흔들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될대로 되라지. '뿌랜드 노 뿌라불럼. 노 뿌라불럼.'하던 인도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마침 물소리. 큰일을 해결한 것을 축하. 6분이 걸렸구나.)
마이 인디안 뿌랜드는 나에게 ‘에브리띵 이즈 노 뿌라불럼’이라고 했지만 나는 매니매니 빅 뿌라불럼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당장 갑자기 네이버 블로그는 서비스개선을 위한 정기점검을 한다며 1시까지는 작성중인 내용을 반드시 저장하라고 협박합니다. 지금은 12시 31분. 망할 뿌라불럼. 다음 카페로 옮겨도 지금처럼 써질까 걱정하며 페이지를 옮깁니다. 망할 네이버. 가끔 뭔가를 남기려고 들르지만 그 때 마다 우연히도 넌 참 부지런하고 매몰차다. 망할 다음카페는 글씨가 딱딱하고 작습니다. 대체 무슨 글씨체로 바꿔야 하는 것인가. 네이버 너는 바탕이냐, 굴림이냐. 귀찮아져버렸습니다. 글자들을 긁어다가 한글 빈문서로 옮겨 빨간 줄들을 제거하고 난 지금 시각은 12시 37분. 기분 전환을 위해 음악을 다시 골랐습니다. 선곡의 조건은 ‘듣기에 불편하지 않아야 한다.’ ‘오늘 나의 분위기와 맞아야 한다.’ ‘가사가 현재의 감성에 잘 어울리되 들리지 않아야 한다.’입니다. 최근에 추가된 조건 ‘그를 떠올리게 하지 말 것.’ 이런. 선곡이 지나치게 좋습니다. 미미 시스터즈의 ‘내 말이 그 말이었잖아요.’ 잠시 거북이목을 인도인처럼 흔들어봅니다. 잠시 음악 감상. 조건을 미충족. 선곡을 바꾸겠습니다. 전기뱀장어의 흡혈귀. 12시 55분. ‘졸릴 때 까지’라는 가사를 마지막으로 2분 22초의 흡혈귀가 사라집니다. 감미로운 흡혈귀.
아 참. 다시 돌아와 12시 31분에 내가 말하려던 나의 뿌라불럼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최근 한 달, 나는 이상한 동거를 했습니다. 무려 세 명의 남성과 함께 20평도 채 되지 않는 집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누구와도 온전한 소통을 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수컷들끼리는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별것을 다 아끼다 못해 말까지 아끼는 남동생, 정확히 할 줄 아는 한국말이라고는 ‘안녕히 계세요.’와 ‘씨발’ 밖에 모르는 프랑스 친구, 그리고 코리안 이긴 하지만 오리지날 야옹스피커인 수컷 몽군. 우리는 말도 없이 한 달이나 살았습니다. 긴장으로 시작한 기묘한 동거는 희한하게 흘러갔습니다. 24시간이 모자란 게임폐인 남동생이 어느 날 350개가 넘는 게임을 보유하고 있는 프랑스친구와 (말이 필요 없는) 게임을 함께 하기 시작했고 그런 인간들을 관찰하기를 즐기는 몽군이 그 곁을 다소곳이 지켰습니다. 기묘하고도 조화로운 공간이 되어갔습니다. 그 공간의 유일한 암컷인 나는 금세 말 대신 방쿠를 트며 모니터 한 구석을 차지하고는 게임을 배우기 시작했고, 수컷들은 볼일을 보는데 화장실 문 닫는 일을 잊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어졌습니다. 아쉽게도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오랜만의 긴장이었는데. 정말 오랜만이었는데. 언젠가 다시 보자며 인사를 건네는 그에게 나는 그럴 돈도 시간도 없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몇 가지 게임과 자신의 최고게임기록을 캡쳐한 이미지파일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나는 이다지도 긴장이라고는 없는 사람. 인도에서 처음 만난 그 친구와는 만난 지 열흘 만에 한 달간의 동거를 결정하고는 룸메이트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때도 남매 같았던 그와 나였지만 한국에 온다던 그를 기다리며 괜스레 설렜습니다. 한 달이나 살며 손 한번 스치지 않았던 그와 나였지만 한국에서는 조금 다르려나 하고는 설렜습니다. 웬걸. 안부를 묻는 이메일에 슬쩍 내 이쁘장한 친구 이메일을 묻는 그 인간도 다른 수컷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나는 다시금 노 뿌라불럼의 나라로 떠날 때가 되었나봅니다. 나는 나의 방쿠까지 노뿌라불럼해줄 보이뿌렌드가 필요해졌습니다. 대체 무엇이 뿌라불럼이었을까요. 뿡.
2시 1분. 문득 바라본 천장엔 모기가 두 마리 있습니다. 다시 내려다본 모니터 앞에 모기가 한 마리. 이이이이잉. 키스하고싶다고? 나에게 구애하는 흡혈귀. 그를 오른쪽 검지손가락과 엄지손가락만으로 덥썩 잡아버렸습니다. 자기야. 도망쳤어야지. 바스라져버린 그를 제물처럼 지우개 위에 올려두고 1초 묵념. ‘이생의 인연은 여기까지구나. 다음 생에서 만나면 우리 그 땐 연애하자.’ 손가락을 슥 마주 비비고는 다른 흡혈귀가 목덜미에 남긴 흔적을 긁적긁적.
구부정한 어깨를 쫙 폅니다. 거북의 목처럼 흐느적한 목을 한 바퀴 빙 돌리고는 전기뱀장어가 부르는 2분 22초의 ‘흡혈귀’에 다시금 귀를 기울여봅니다. 감미로운 흡혈귀. ‘졸릴 때 까지’라는 가사를 마지막으로 2분 22초의 흡혈귀가 사라집니다.
지금은 2시 22분. 졸리니까.
나도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