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담잡설(茶談雜說): 차 마시다 떠오른 별별 생각
지난해 추수한 양식은 다 떨어져 가는데 올해 파종한 보리가 아직 여물지 않은, 오뉴월의 배고픈 시기를 보릿고개라고 한다. 차 마시는 사람에게도 이와 비슷한 궁핍한 기간이 있다. 녹찻고개라고, 올해 새 녹차가 나오기 시작하는 4, 5월 이전의 2-3월이 그때다. 녹차는 다른 차들과 달리 아무리 잘 보관을 한다 하더라도 맛이 빨리 변하기 때문에 그때그때 마셔버려야 한다. 5월에 구입한 햇녹차는 사실 벌써 마셔 버린 지 오래다. 녹차를 못 마셔서 괴로운 것보다는 날이 풀려갈수록 햇녹차를 기다리는 조바심과 설렘이 크다.
1년 동안 차의 메뉴를 짜 보면, 일단 햇녹차가 나오기 시작하는 봄부터 여름까지는 녹차와 백차를 주로 마신다. 냉침으로도 시원하게 마실 수 있는 녹차가 좋다. 그러다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 점차 청차(우롱차)와 홍차를 자주 마신다. 한겨울이 되면 흑차를 연하게 펄펄 끓여서 물처럼 홀짝인다.
맛이 빨리 변하는 녹차를 서둘러 소비하고, 상대적으로 장기 보관이 용이한 청차, 홍차, 흑차를 천천히 소비한다. 한의학에서는 녹차와 백차가 열을 내리는 기능이 있고, 청차, 홍차, 흑차가 체온을 올려주는 기능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을 신봉하지는 않지만 얼추 차 소비의 패턴이 이와 맞아떨어진다. 더운 여름에 녹차와 백차를 마시고, 추운 겨울에 다른 차를 마시니 말이다.
녹찻고개의 증상을 악화시키는 것은 올해 보성과 하동의 차 축제의 소식이다. 보성 다향대축제는 5월 2일부터 6일까지 5일간, 하동 야생차문화축제는 5월 10일부터 13일까지 4일간이다. 두 차 축제를 일주일 간격으로 떨어뜨려 놓은 것은 축제 참가자들에게는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두 축제를 모두 돌아 보고픈 관광객들에게는 즐거운 또는 심각한 고민거리라고 하겠다. 하동이냐 보성이냐?
개인적으로 보기에 보성은 녹차와 가향차가 좋고, 하동은 홍차가 좀 더 좋은 듯하다. 볼거리와 먹을거리는 둘 다 충분하다고 본다. 하동은 산과 강이 좋고, 보성은 바다가 가깝다. 어디로 가야 하나, 둘 다 가야 하나...
차 축제와 함께, 문경의 찻사발 축제에도 관심이 간다. 그렇다, 찻사발을 주제로 한 축제가 있다. 처음에 방문할 때에는 '그냥 도자기 축제를 찻사발 축제라고 이름 붙였겠지'라고 반신반의했었는데, 정말 다기가 주인공인 축제가 맞다. 한옥 세트장 속에 전시부스를 두는데, 정신줄 놓고 이 건물 저 건물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다녔었다. 정말 마음에 드는 다기를 구하고 싶다면 이 축제 방문을 추천한다. 한옥마을 세트장을 돌아다니는 재미도 쏠쏠하다. 올해는 4월 27일부터 5월 6일까지 문경새재 무슨 오픈세트장에서 열린다.
녹찻고개가 끝날 때까지 아직 한 달이나 넘게 남았다. 나의 조바심과 설렘을 느끼면서 남녘 차밭에서는 하나, 둘, 녹차 싹이 돋아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