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담잡설(茶談雜說): 차 마시다 떠오른 별별 생각
마신 차: 문산포종차. 3g, 95도, 40s-20s-40s-1m
침실 창 밖에 벚꽃이 마악 피기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꽃이 피어가는데, 매일 아침마다 꽃님을 마주할 생각에 눈이 번쩍 떠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다. 일어나자 마자 창문 앞에 찻자리를 차리고 멍 때리며 차를 마신다. 꽃을 바라보며 마시니 문산포종차의 향기가 배가 되는 듯 싶다. 이런 사치가 또 있을까? 초라한 원룸이 호화로운 별장으로 변신한다. 진정 봄날에만 즐길 수 있는 소확행이다. 일찍 일어 났지만 정작 출근은 하기 싫어 창 앞에서 밍기적 거리다 지각을 하는 것이 요즘 나의 일상이다.
목련은 피어 흰 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바람에 찢겨 한 잎씩 꽃은 흙으로 가네
'곧 저 꽃들도 지겠지?'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우울감이 찾아 온다. 지금 순간의 찬란함만을 즐기자고 하는데도, 길바닥에 떨어진 꽃잎이 하나 둘 짓밟혀 쓰레기로 변해가는 모습을 상상하면 눈물이 찔끔 난다. 봄이 와서 꽃이 피면 겪는 목련앓이다.
서운한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김광석의 "목련은 피어 흰 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로 시작하는 "회귀"를 흥얼거려 본다. 이 노래를 듣고 나서 왜 김광석을 음유시인이라 부르는지 알았다.
대학시절 이 노래의 잔상 때문이었는지 캠퍼스에서 떨어지는 하얀 목련 꽃잎을 보며 한동안 발길을 떼지 못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아직 회색이 지배하는 초봄에 하얗게 피워 올린 목련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던지. 그런데 그 곱던 꽃잎이 떨어지고 나면 추한 갈색으로 변하고, 행인들에게 밟히면서 초라하게 사라져 가는 모습이 캠퍼스의 푸릇푸릇한 친구들과 대비되어 보였었다.
젊은 날 빛을 뿜던 친구들 모두,
짧은 눈부심만 뒤에 남기고,
긴 기다림만 여기 남기고, 젊은 날~
평생 함께 하자던 대학시절 그 친구들 지금은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지. 강당에서, 동아리방에서, 술집에서 뿜어대던 젊은 패기를 고이 간직하고 있을런지. 마치 목련처럼 흰빛만 하늘로 올려 보내고 흙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을런지. 짧은 눈부심만 뒤에 남기고, 우리 모두 긴 기다림만 마주하고 있다.
"회귀"는 김지하 시인의 시에 황난주가 노래를 붙인 것이다. 4집 음반에 수록된 곡인데 발매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었지만 꾸준히 사랑을 받는 듯하다. 하긴 나도 봄만 되면 이 노래를 찾아 듣고 부르니 말이다. 김지하 시인은 요즘에는 거친 이미지가 굳어 진 듯한데, 젊은 시절에는 이런 낭만적인 시도 썼었다.
그나저나 김광석 4집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명반이다. "서른 즈음에, " "일어나," "바람이 불어 오는 곳,"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 등등 수록되어 있는 모든 곡이 주옥 같다. 그 속에서 소품같은 "회귀"가 주목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 음반이 김광석의 마지막 앨범이 되었는데, 감히 추측컨대 '이 보다 더 좋은 음반을 만들 수 없다'는 한계를 느꼈던 것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