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담잡설(茶談雜說): 차 마시다 떠오른 별별 생각
마신 차: 연우제다 세홍. 3g, 95도, 30s-20s-20s-30s-40s/ 작두콩차. 2g, 99도
대학시절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Walden)" 두 권을 꼽는다. "소유냐 존재냐"는 한참 새내기일 때 리포트 때문에 처음 접했었다. 당시 이기론, 노장 사상 등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았었는데, 동양과 서양 철학을 아우르는 에리히 프롬의 저작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세계관을 형성해 가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졸업반 시절 읽은 소로우의 "월든"은 학부 이후 생태경제학이라는 대학원 전공을 선택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 고마운 책이다.
책장에 고이 모셔두었던 "소유나 존재냐"를 꺼내서 다시 읽었다. 프롬은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을 소유 지향과 존재 지향의 삶으로 나눠서 보았다. 소유 지향의 삶은 돈, 명예, 권력 등 많이 소유하는 것이 인생의 주제인 삶이고, 존재 지향의 삶은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에 집착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재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여 주변의 세계와 하나가 되는 것이 주제인 삶이다. 프롬이 주장하는 존재 지향의 삶은 동양의 무위자연 사상과 유사한 면이 있다.
만약 내가 소유하는 것이 나의 존재를 규정한다면,
내가 소유물을 잃어버릴 때 나는 어떤 존재가 되는가?
프롬은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의 삶이 소유 지향에 기울어 있다고 비판하며, 존재 지향의 삶을 추구하는 사회로 변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 책은 프롬의 평생의 연구를 축약한 역저로서 다양한 성찰이 담겨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사랑과 결혼에 대해 논한 부분은 지금 다시 읽어 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프롬은 사랑을 나와 상대방의 생명을 증대시키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우리는 사랑을 소유할 수 있을까? 사랑이란 사물은 없고, 사랑하는 행위 또는 마음의 상태만 존재하기 때문에 소유할 수 없다. 사랑은 서로 존중하고, 더 깊이 알고, 밀접히 반응하고, 긍정하고, 향유하는 행위, 더 나아가 생명을 주는 행위이다. 그의, 그녀의, 그것의 생명력을 증대시켜 주는 행위, 그리고 자신의 생명력도 증대시키는 과정이다.
프롬은 사랑은 소유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현대 사회에서 '소유'의 형태로 사랑하는 방식에 대해 비판한다.
오늘날 사랑을 하는 방식은 사랑하는 대상을 구속하고 감금하고 또는 지배하는 것이다.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압박하고 약화시키며 질식시켜 죽이는 행위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사랑한다는 표현으로 "너는 내꺼"라고 흔히 쓰는 표현이 떠올랐다. 내가 온전히 '너의 것'이 될 수 있을까? 내가 또는 네가 소유할 수 있는 사물인가? 사랑한다면 너를 내가 완전히 소유해도 되나? 사랑? 얼마면 될까? 얼마면 되겠니? (잠시 원빈 빙의...)
노예제가 없는 이상 사람의 육체 또는 마음을 소유할 수는 없다. 사랑한다는 의미로 쓰는 관용 표현에 딴지를 걸지 말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우리 일상생활이 얼마나 소유 지향으로 기울어 있는 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프롬의 관점에서 볼 때 100% 소유 지향의 삶의 태도가 반영된 말이다. 사랑까지도 소유의 대상으로 의식하고 있는, 참 저렴한 표현이다.
사랑한다면 그 사람 또는 사물을 완전히 소유하려고 하기보다는 그 자리에서 그 모습 그대로 나와 함께 행복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게 존재 지향의 사랑법이다. 들판의 아름다운 꽃을 꺾어서 가져오면 그 아름다움을 나의 창가로 옮겨 올 수는 있지만, 그 아름다움이 오래갈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우리들은 사랑한다면서 상대방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통제하려 한다. 프롬이 지적한 대로 생명을 주는 대신, 사랑의 이름으로 질식을 시킨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존재 지향의 사랑을 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연인의 핸드폰에 절대 손을 대지 마시라. 요즘에 핸드폰은 한 사람의 밝은 면, 어두운 면을 모두 담고 있는 매우 사적인 물건이 되어서 그 누구의 핸드폰에도 함부로 손대지 않는 것이 에티켓이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이유로 너무나 당연하게 연인에게 핸드폰의 비밀 번호를 알려 달라고 하고, 내용을 뒤져 보고는 한다.
사랑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지배하려 드는 소유 지향의 사랑법이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도 존중받아야 하는 사생활이 있다. 상대방이 보여주기 싫어하는 것은 보여주지 않게끔 내버려 두시길.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나에게 보여주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면 된다.
프롬은 이러한 소유 지향의 사랑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결혼의 문제점도 짚고 있다. 약 40년 전에 쓰여진 내용인데도, 마치 오늘날의 사회상을 얘기하는 듯하다. 결혼을 했거나, 부모님의 결혼생활을 유심히 지켜봐 왔다면 크게 공감할 것으로 생각한다.
결혼은 파트너 각자에게 상대방의 육체, 감정, 관심의 독점적 '소유'를 인정한다. 이미 사랑은 그가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 즉 하나의 재산이 되었기 때문에 누구의 관심도 살 필요가 없다. 두 사람은 사랑스러운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거나 사랑을 연출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서로에게 실망하고, 속았다고 말한다.
사랑을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이 사랑하지 못하게끔 만든 이유임을 알지 못한다. 이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 돈, 사회적 지위, 가정, 자식의 공동 소유로 만족한다. 이렇게 하여 어떤 경우에는 사랑에 바탕을 두고 시작된 결혼이 사이가 좋은 소유 형태로 변모해 버린다. 두 개의 자기 중심주의를 하나의 합동 자본으로 삼은 회사, 즉 '가정'이라는 회사가 되는 것이다.
'잡은 고기에는 밥을 주지 않는다'라고 했던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나의 얘기는 아니야'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작가는 처음 이 구절을 읽으면서 뜨끔했었다. 뼈를 때리는 통찰이다. 한번 곰곰이 돌아보시길.
"너무 사랑해서, 밤마다 헤어지는 것이 싫어서 결혼을 결심했어요." 오늘날 결혼은 마치 사랑의 결론처럼 인식된다. 그런데 그게 과연 맞는 것일까? 너무 사랑한다면 결혼이라는 제도권으로 편입되지 않고 그냥 현재의 모습 그대로, 불안하게(?) 사랑하는 게 낫지 않을까?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을 하더라도 공동생활을 하면서, 하루하루 생존에 맞닥 뜨리면서 결혼은 소유 지향으로 흘러간다. 점차 회사가 되어가는 것이 잔인한 진실이다.
프롬은 결혼이란 제도 자체를 비판한다기보다는 우리 사회의 소유 지향적 태도로 인해 결혼이 '소유할 수 없는' 사랑의 결정이 아닌 더 많은 소유를 위한 회사처럼 되어 버린 것을 지적한다. 동의한다. 우리 주변의 흔한 결혼을 관찰해보면, 이건 공동육아, 재산의 증식,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한 회사다. 그 속에서 사랑은 이 회사의 창립 설화, 희미한 옛 추억일 뿐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결혼의 성격에 대해서 프롬이 역사적인 맥락을 놓쳤다고 생각하는데, 결혼은 원래부터 비즈니스였다. 패밀리 비즈니스. 아주 옛날부터 가문이라는 회사를 번창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이었다. 일손의 충원과 가족 구성원의 재생산, 그리고 다른 가문과의 연합을 통한 사세(?) 확장을 위해 결혼을 사용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정략결혼은 흔하다. 시간이 있다면 우리나라 정치인, 기업가들의 혼맥을 검색해 보시라. 아주 컬러풀한, 거미줄 같은 관계도를 여러 장 발견할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는 생각은 사실 상당히 최근에 등장한 것이다. 연애결혼이 보편화되면서부터 등장한 것으로 본다. 현대 산업사회로 이행하면서 농경시대에 번성했던, 가문이라는 큰 규모의 회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고, 핵가족이란 작은 단위의 회사도 훌륭하게 기능할 수 있게 되면서, 배우자의 선택권이 개인에게로 내려왔다. 요즘도 자식의 배우자 선택에 참견하는 전통(?)은 상당히 남아 있지만 말이다.
핵가족 단위에서 배우자를 선택하는 기준으로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가'를 삼은 셈인데, 글쎄 이 기준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기왕에 결혼이라는 회사를 꾸려 나간다면, 사랑보다는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기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 얼마나 경제력이 있는지 등등을 검토하는 게 더 적절하겠다. 사랑이라는 기대감에 시작해서 실망으로 끝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을까?
'사랑할 사람과 결혼할 사람은 따로 있다'라고 떠벌이는 연애경력 만렙의 사람들을 은근히 경멸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돌아보니, 이들이 현명한 거다. 결혼이라는 회사의 본질을 파악하고, 거기에 맞는 사람을 구하겠다는 거다. 나의 생명을 확장해줄, 사랑할 사람은 따로 있다는 거고.
결혼이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을 위한 가장 좋은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고 프롬은 언급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 소유 지향이 만연하였기 때문에 그런 결혼이 어렵다고 비판했다. 우리 부모님들을 보면 투덜투덜 서로에 대해 불평하면서도 사이좋게 공동 소유의 삶을 누리고 계시지 않은가. 존재 지향의 관점에서는 불만족스럽겠지만, 소유 지향의 관점에서 본다면 결혼은 꽤 괜찮은 솔루션이다. 당신네들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 다른 이의 삶의 방식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겠는가. 단지 더 좋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방식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이다.
프롬은 우리가 '주변의 소유물에 의해 지탱되지 않으면 쓰러져 버릴 것'이라는 착각 때문에 소유에 집착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자연과 다른 동료 인간들의 도움으로 충분히 홀로 설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구조 자체가 소유 지향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의 삶에서 소유 지향성을 완전히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존재 지향성을 찾으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하지 않을까. 회사가 되어버린 결혼 속에서도 존재 지향의 사랑을 지펴보려는 시도가 계속되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비즈니스 파트너와 연인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우리의 삶이 더 의미 있고 가치 있어지지 않을까.
그나저나 코로나19의 시절을 맞이하여 먼지 쌓인 고전들을 다시 꺼내 본다. '사회적 거리'는 멀어졌지만 이렇게 고전을 찾아볼 기회를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어쨌건 고전 속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길어 올릴 수 있어서 반가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