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폭풍이 온다는 예보가 떴다. 바다가 가까운 이곳에 비가 오면 눈이 흩날릴 산을 생각한다. 사막 기후인 이곳 서든 캘리포니아는 기나긴 건기가 지나고 겨울이 되어서야 비를 만날 수 있다. 비도 눈도 귀한 이곳에서 한두 시간 운전하는 수고를 하면 눈구경을 할 수있는 빅베어나 마운틴 볼디 같은 큰 산이 있어 감사하다.
어젯밤 확인한 일기예보엔 3일간 눈이 올 확률이 90퍼센트에 가깝다 한다. 아침부터 하늘이 열린 듯 소나기가 퍼부었다. 이런 날씨에도 프리웨이에는 차들이 가득하다. 하늘에서 퍼붓는 비와 프리웨이에서 이는 물보라로 지척을 분간하기 힘들다. 그러나 산에선 이 비가 눈으로 펑펑 쏟아질 거라 생각하니 퍼붓는 비가 반갑기만 하다.
비안개 속에 먼산이 뿌옇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산 아래 이르렀을 때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많은 비가 내렸다면 지금쯤 산정상은 하얀 고깔을 쓰고 있어야 하는데 검은 산 그대로이지 않은가. 기온을 확인하니 오호통재라! 그새 기온이 올라 산정상도 영상의 기온이다. 간만의 눈구경 기대가 쨍그렁 깨지는 순간이다.
빅베어는 내일 만나기로 하고 운전대를 돌려 레이크 애로우헤드로 목적지를변경했다. 애로우헤드로 넘어가는 산은 비구름으로 가득했다. 구름은 정상을 향해 능선을 빠르게 오르고 있었다. 산허리에 차를 세우고 산을 타는 비구름의 신비로움에 한동안 넋을 잃었다. 구름으로 가득한 계곡은 뛰어 내리면 구름 위에 떠있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레이크 애로우헤드는 폭우에 잠겨 있었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비바람에 몸도 우산도 날아갈 판이다. 폭풍우를 뚫고 일단 가까운 멕도널드에 들렀다. 매장엔 유난히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이 많았다. 저들도 눈을 기대하고 왔을 터이다. 눈썰매를 챙겨 들떠서 집을 나섰을 아이들에겐 참으로 야속한 비다. 비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은 폭우에 감히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여기저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이왕지사 벌어진 굿판이니 즐기리라. 뜨거운 맥커피 한잔과 사과파이를 시키고 호수가 보이는 창가에 자리 잡았다. 뒷 테이블에는 아가씨들이 수다삼매경이다. 옆 테이블에는 젊은 엄마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들을 챙기느라 바쁘다. 창가에 선 연인은 비를 감상하며 사랑의 눈빛을 주고 받는다. 차갑고 사나운 바깥 공기와 대조적으로 카페 안은 따뜻하고 평화롭다.
빗소리로 가득한 호수를 바라보고 있자니 며칠 전 읽은 책 유럽의 음악축제 이야기가 떠오른다.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브레겐츠에선 보덴 호수 위에 무대를 세워 오페라 공연을 한다 했다. 관중은 호수가 바라보이는 객석에 앉아 공연을 즐긴다. 공연은 해질녘 붉은 석양과 함께 시작된다. 태양이 지고 호수 위에 조명이 밝혀지며 화려한 오페라 무대가 시작된다. 상상만으로도 전율이 이는그곳을 언젠가 꼭 가보리라 했다. 오늘 그 보덴 호수의 무대가 유럽을 날아 이곳 레이크 애로우헤드에 찾아온 것일까. 멕도널드 카페가 콘서트장 객석으로 바뀌었다.
거센 빗줄기가 호수를 두드리며 오케스트라를 연주한다. 바람의 지휘에 빗줄기는 긴 사선의 현을 켠다. 겨울나무는 비의 연주에 맞춰 헤드뱅잉을 한다. 콘서트가 호수에서 펼쳐진다. 빗줄기는 수면 위에 무수한 동그라미를 그리며 음표를 만든다. 이따금 날아오르는 새들은 빗줄기 오선지 위를 지나는 쉼표가 된다. 비는 굵어졌다 가늘어지기를 반복하며 아다지오에서 모데라토로, 알레그레토에서 비바체로 화려하게 바뀌었다가 다시 아다지오로 가쁜 숨을 고른다.
겨울 호숫가에 말러의 교향곡 5번 아다지에또가 들려온다. 아다지에또를 들을 때 마다 겨울 호수를 상상했었다. 현악기로 어우러진 음들이 겨울새와 함께 호수 위를 난다.
1900년대 빈 왕립 오페라단을 이끌던 구스타프 말러는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여인 알마 신들러와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매력적인 그녀에게 많은 남자들이 구애를 한다. 말러도 그중 한명이었다. 말러는 알마에게 교향곡 5번 4악장을 헌정하며 그녀의 마음을 차지했다.
4악장 아다지에또는 오케스트라의 관악기를 모두 쉬게 한 채 현악기로만 연주된다. 현이 내는 팽팽한 음과 여러 옥타브를 넘나드는 화려한 음이 사랑의 환희와 절망, 황홀과 고뇌를 절절하게 표현한다. 사랑의 고백은 설레임의 순간과 그리움의 아픔을 넘어 아다지에또로 숨을 고를 수 있을 때야 비로소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겨울 호숫가에서 듣는 말러의 아다지에또는 희미하게 잠겨있던 사랑의 기억을 되살린다.
비의 콘서트가 한차례 지나간 호수를 걸었다. 감동의 여운이 남아 연주장을 쉬 떠날 수 없었다. 비안개로 가득한 호수를 새들이 날며 여운을 더한다. 산도 호수도 마음도 시나브로 비에 젖어갔다. 오늘 밤은 가까운 Hesperia에서 몸을 누이고 내일 눈을 맞으러 다시 산을 오를 것이다.
*저녁은 yelp에서 찾은 Hesperia 근처 식당 중 Havanazucar Cuban restaurant 이 있어 쿠바음식이 궁금해서 먹었다. 그닥 크지 않은 식당에 쿠바 국기와 하바나 풍경사진이 걸려있었다. Arroz Frito Cubano Especial이란 새우와 햄 야채를 넣은 볶음밥과 직원이 권해준 캐리비언 치킨샐러드를 시켰다. 훌륭한 맛이었다. 학창시절 체게바라와 카스트로의 쿠바혁명에 대한 책을 읽고 체게바라의 매력에 빠졌었다. 미국과 쿠바는 오랜 냉전을 종식하고 오바마 정권시절 문호가 잠시 열려 여행이 허락되기도 했었는데 트럼프 정권에서 다시 닫아버렸다. 미국의 오랜 경제제재로 쿠바는 물자부족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잠깐이었지만 문호가 개방되면서 체게바라와 헤밍웨이가 사랑한 쿠바에 대해 음악으로 글로 접할 기회가 있었다. 언젠가 다시 문호가 열려 하바나에서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의 음악을 듣고, 헤밍웨이의 자취를 찾고, 정 많은 쿠바 친구를 사귈 수 있는 날이 오길 희망한다. 우리 앞자리에는 중년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백인 여성과 진솔한 인상의 흑인 남성이었다.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그 여자분의 생일인지 직원이 작은 케이크를 들고 와선 생일축하 노래를 불렀다. 두 사람은 참 진지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가까운 미래에 미국과 쿠바도 저렇게 아름답게 마주볼 날이 오기를 상상하며 함께 축하노래를 불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