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2021 일상에서
주말, 친구와 산을 올랐습니다. 굽이굽이 산을 돌아 오르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종아리가 뻐근하고 숨이 가쁘고 무릎이 지끈거려 도중에 몇 번을 주저앉아 쉬었습니다. 곧 도착할 거라는 정상은 한참을 올라도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꼬불꼬불 둘러가는 길을 만날 때면 어디 곧장 올라가는 직선의 지름길은 없나 살피기도 했습니다. 산허리쯤 다다랐을 땐 정상은 포기하고 이대로 돌아내려갈까도 싶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올라 마침내 정상에 다다랐습니다.
정상에 올라 내려다보니 땀 흘리며 걸어 올라온 산길이 저 아래로 펼쳐져 보입니다. 산길은 똑바름이 없고 구불구불 굽이치며 산허리를 돌고 돕니다. 산아래에서 이 정상까지 이어진 길은 오랜 시간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다져져 반짝입니다.
굽은 산길을 한참 바라보다 문득 내 인생은 무슨 모양이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직선처럼 살고 싶어 부단히 달려왔습니다. 한 치 앞만 바라보며 막힘없이 나아갈 땐 내가 가는 길이 직선인 줄만 알았습니다. 이제 돌아보니 지나온 인생길도 돌고도는 곡선의 날들이었습니다. 이 길이려니 하고 가다 아니다 싶어 꺾어가고, 저 길일까 하고 무작정 가다 막혀 돌아가고, 참으로 삐뚤빼뚤한 날들이었습니다. 저 굽은 산길을 영락없이 닮았습니다.
인생길이 힘에 부칠 땐 한달음에 목표지점에 데려가 줄 것 같은 곧게 뻗은 지름길의 유혹을 떨치기 어려웠습니다. 혹여 삶을 쉽게 갈 수 있는 길은 없는지 물었을 때 선배는 "Everything comes at a cost."라며 모든 일은 대가가 따른다 했습니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달라이 라마는"그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가장 값싼 길이 뭐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 값싼 길에 한없이 한눈팔며 지나온 날이었습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당연한 순리 앞에서도 겨울은 우리에게 그리 쉬 봄의 자리를 내주지는 않습니다. 꽃망울이 맺히나 싶으면 바람 불고 비 뿌리고 추워지고, 따스해질 만하면 다시 얼어붙는 날이 오가며 봄은 둘러둘러 옵니다. 그럼에도 봄이 곧장 직선의 시간을 넘어오기만을 고대하던 나의 조급함을 저 굽은 길이 보여줍니다.
산을 내려오는 길엔 계곡의 물길 따라 자갈이 널려있었습니다. 어느 하나 뾰족함이 없이 깎이고 깎여 둥글둥글했습니다. 자연에 오니 온통 곡선으로 가득합니다. 계곡에 돌돌 구르는 자갈도, 하늘 가득 그림을 그리는 구름도, 바위 사이에 빠꼼히 고개를 내민 들꽃도, 늑장 피다 채 지지 못한 하얀 반달도, 굽이치는 산길도, 둥금과 곡선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도심에서 수많은 직선에 갇혀 살았습니다. 네모난 자명종을 끄고 일어나, 직선으로 뻗은 아스팔트 길을 달려, 네모난 사무실에서 네모난 컴퓨터를 켜고, 네모난 셀폰으로 각진 대화를 하며 세모난 지붕 아래로 돌아와 잠이 들었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리며 뾰족한 인간관계 속에서 곧은 것만이 살길인 줄 알고 매달렸습니다. 그 삶 어느 한구석에 긴 세월 물살에 깎여온 저 자갈처럼, 누구에게나 따뜻함을 비추어 주는 저 해처럼, 둥금이 있었던가 싶습니다.
둥근 저 자연은 내게 말합니다. 질러가는 곧은 길이 꼭 빠른 것은 아니라고, 가파른 지름길은 발을 삐어 더디 갈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직선의 고속도로 위에서 쌩쌩 달아나는 풍경을, 돌아가는 굽은 국도에서는 천천히 아름답게 만날 수 있을 거라 합니다. 둥글둥글한 관계가 귀한 인연을 만들고, 직언보다 돌려 하는 말이 덜 아프다고 귀띔합니다.
자연은 흘러가는 데로 몸을 맡깁니다. 천년을 흐르는 강, 오래된 산길, 바람에 허리 굽은 고목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었는지 모릅니다. 흘러가는 데로, 다가오는 물과 바람을 오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품어주기. 삶도 많은 부분 그렇게 품어주고 흘러가도록 내버려 둬야 하는 것이었을까요. 누군가는 저항하거나 맞서 개선하려 하지 않는 그들이 무기력하다거나 무책임하다며 속 모르는 소리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죽을힘을 다해 참고 노력했던 건지 모릅니다. 품어주려고, 물과 바람의 의지를 꺾지 않으려고, 존중해 주려고, 그 인내로 몸은 굽어지고 모난 면이 깎여 둥글어져 버린 것이겠지요.
굽은 길, 골이 깊은 주름살, 휘어진 허리, 돌아 돌아 흐르는 강, 모두 주위를 넉넉히 안아주고 품어주며 살아온 시간의 흔적임을 산을 다녀오며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