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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 Bear Lake에서 만난 눈나라

day2. 1.15.2023

by 류재숙 Monica Shim

아침 기온이 손이 시릴 정도로 쌀쌀하다. 어제는 레이크 애로우해드에서 돌아와 저녁 산책을 밖에서 하고 싶었지만 비바람이 심해 이내 안으로 들어와야 했다.


여행을 가면 반드시 그곳의 트레일을 하나 이상 찾아 걷곤 한다. 살면서 쌓인 감정의 찌끼들이 자연을 만나 걷다 보면 어느샌가 스르르 녹아내린다. 자연에서 선함을 찾으라 했던가. 존뮤어의 말처럼 자연을 만날수록 날이 선 감정도 둥그러진다. 어제는 폭우로 트레일 걷기를 포기해야 했다. 대신 오늘은 눈길을 걸어야겠다.


일기예보는 Big Bear Lake에 어젯밤부터 내린 눈이 오늘까지 이어 내릴 거라 한다. San Bernardino National Forest에 자리한 빅베어 호수는 눈이 귀한 이곳 Southern California에서 눈을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이다. 여름엔 푸른 호수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겨울엔 눈을 만날 수 있다.


빅베어 레이크 서남쪽에서 진입하는 38번이나 330번 길로 평소 올라갔었는데 이번엔 북동쪽에서 들어가는 18번 길로 가보기로 했다. 15번 north를 타고 Bear Valley Road에서 나와 Apple valley를 거쳐 Lucerne Valley를 지나갔다. 38번이나 330번 길은 경사나 굴곡이 심한 산길을 한참 올라야 한다. 특히 눈이 오는 날은 스노우체인을 감고 가야 해서 교통정체도 심하다. 반면 18번에서 오르는 길은 경사나 굴곡이 적고 레이크까지 거리도 짧았다. 그 대신 북쪽으로 더 올라가야 하니 남쪽 도시에서 가려면 거리는 더 먼 셈이다.


루센벨리는 여름에 왔을 때와 다름없이 황량한 사막 벌판에 모래바람이 흩날리고 있었다. 루센벨리 뒤로는 서든 캘리포니아에서 최고봉인 3500미터의 San Gorgonio Mountain이 흰 눈을 덮어쓰고 허리에 구름을 찬 채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최고봉인 Mt Whitney보다 1000미터 가까이 아래지만 위용이 대단하다. 저 구름이 산을 넘어오면 이 루센벨리에도 비의 은총을 맛보련만 구름은 높은 산을 넘기 버거운지 산허리에만 머물고 있었다. 루센벨리엔 농장을 경영하는 한인들이 제법 있다. 이 척박한 땅에서 농사짓는 그분들 덕에 해마다 크고 맛난 대추를 맛볼 수 있다.


산언저리를 오를 때만 해도 마른땅과 바위만 보였는데 중턱을 돌아서니 갑자기 눈발이 날린다. 몇분 채 지나지 않아 눈 쌓인 언덕길이 나타났다. 길가엔 차들이 줄지어 서서 스노우체인을 감느라 분주하다. 드디어 눈길 오르막이 시작되나 보다.


눈꽃을 피운 크리스마스트리로 가득한 숲을 만났다. 이어서 눈이 흩날리는 들녘이 펼쳐졌다. 호수로 이어지는 들은 내리는 눈 속에서 수묵화 한 점을 그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끊임없이 날아오는 눈송이들이 흰붓을 들고 산과 들을 칠한다. 흰색 외엔 어떤 색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세상을 하얗게 덮어가고 있었다.


눈을 잔뜩 머리에 인 차들이 산을 내려온다. 어젯밤을 산에서 보내고 내려오는 차들이다. 부러웠다. 밤새 큰 창 앞에 서서 벽난로의 뜨거움을 받으며 내리는 눈을 감상했을 그들의 지난밤이 부러웠다. 밤새 소리 없이 쌓이는 눈, 적요(寂寥)한 숲에 솔가지를 부러뜨리는 눈의 무게와 가로등 아래 흩날리는 흰 무희들의 춤을 고스란히 지켜보았으리라. 그리고 새벽녘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뽀드득 소리 내며 걸었으리라.


눈썰매장에선 사람들의 즐거운 비명이 눈썰매에 실려 미끄러진다. 아이도 어른도 함박웃음으로 함박눈을 맞이한다.하늘에서 뿌려주는 얼음가루만으로도 이리 행복할 수 있건만 우린 행복을 찾아 어찌 먼 길을 떠나는가.


숲 속 비탈진 언덕마다 아이들이 썰매 타느라 신이 났다. 삐까번쩍한 스키장을 데리고 가지 못하는 가난한 아빠들이 숲으로 와 공짜 행복을 선물한다. 아이에게 기쁨을 주고픈 가난한 아빠의 사랑이 숲을 채운다. 강아지들도 덩달아 즐겁다. 코비드 바이러스가 아닌 행복 바이러스가 퍼진다.

빅베어 타운은 간만의 눈구경으로 사람들로 가득했다. 식당마다 최소 한 시간 반은 기다려야 자리가 난다는 대답을 듣고 번번이 뒤돌아 나와야 했다. 결국 한 시간 반을 기다려 맥주 한잔과 햄버거 하나로 오랜 기다림의 허기를 달랬다. 그래도 인상 쓰는 사람이 없다. 펑펑 내리는 눈이 마법을 부려 짜증 내는 마음까지도 앗아버렸다.


메마른 크리스마스를 맞아야 했던 서든 캘리포니아 사람들이 늦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만났다. 거리엔 눈사람을 만드는 사람, 눈싸움을 하는 아이들,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손잡고 걸어가는 연인,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눈을 받아먹는 이들도 있다. 사람 구경에 신이 난 Big Bear 동상도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머릿속 가득하던 고민과 걱정은 산 아래 버렸다. 그저 동심의 설렘만 가득한 눈 내리는 타운의 풍경이 카메라 뷰파인더에 담긴다.


눈 내리는 빅베어 호수는 고요했다. 여름내 물놀이로 지친 배들은 온몸으로 눈을 맞으며 쉬고 있었다. 눈송이는 호수에 내리는 순간 가제가미의 운명이 되어 사라질 줄 알면서도 너도나도 뒤따라 불나방이 되어 호수에 몸을 던진다. 눈을 끝없이 먹으며 호수는 하얗게 변해간다. 눈이 호수에 빠지는 건지 호수가 눈에 빠지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눈안개 가득한 호수 위로 겨울새 날아오른다.


여름내 생명을 키우느라 애쓴 초록의 숲에 이젠 쉴 때라며 토닥이듯 흰 솜이불을 덮는다. Dance란 단어의 어원인 Tanha는 생명의 욕구를 뜻한다 했던가, 생명의 욕구로 가득한 벌판과 숲으로 눈은 생명을 품고 춤으로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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