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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cken Soup을 끓이며

2023.1.9

by 류재숙 Monica Shim

한 해가 소리 없이 가고 또 한 해가 말없이 다가왔다. 새해와 함께 코비드 바이러스도 슬그머니 찾아왔다. 지난 3년간 지구를 들었다 놨다 하며 맹렬을 떨치던 코비드가 사그라들 것 같은 이제야 나를 방문한 것이다. 그냥 떠나기 아쉬워 작별인사라도 하고 싶었던 겐가. 새해 보름 가까이를 칩거해야 했다. 오는 새해도, 코비드도 반가운 손님이 아니건만 허락도 없이 찾아와선 곁에 눌러앉으니 속수무책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멍석말이라도 당한 듯 온몸이 아팠다. 연말 바쁜 시간을 보낸 후 온 몸살이려니 했다. 목에서 쉰소리가 나며 입맛이 썼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코비드 테스트를 했다. 임신 테스트기처럼 생긴 코비드 테스트기에 막대 두 개가 선명히 나타났을 때 늦둥이라도 확인된냥 난감했다. 마침내 세기의 바이러스와 조우하게 되었다는 반갑지 않은 설렘은 또 무언지.


처음 며칠은 목감기약을 먹고 종일 약 먹은 병아리 모양 앉으나 서나 졸았다. 평소 동경하던 허스키보이스였건만 쇳소리를 내는 목청은 노래라도 불러볼라치면 제 음을 내지 못하고 돌부리에 걸린 듯 튕겨나가 듣썽사나운 소리를 냈다. 음치의 괴로움이 이런 거로구나. 먹는 낙도, 노래 부르는 낙도, 마실 나가는 낙도 앗아가 버린 몹쓸 바이러스 같으니라구. 세상과 격리되어 있는 시간은 감옥에 갇힌 듯 답답했다.


아픈 몸을 일으켜 뭐라도 만들려 부엌으로 내려왔다. 아침 창엔 비가 내리고 나는 치킨숲을 끓였다. 닭에 찹쌀을 넣고 마늘과 인삼 대추까지 넣은 한국식에 당근 양파 셀러리를 넣어 서양식 레시피까지 더했다. 동서양 레시피가 합해져 울트라 치킨숲이 되었다.

스토브 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치킨숲을 지켜보다 문득 지난날 읽었던 'Chicken Soup for the soul(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책이 생각났다. 타임지에 기고한 독자들의 감동적인 글을 모아 시리즈로 발행하던 책이다. 힘든 일이 있어 마음이 닫히려 할 때 그 책을 읽다 보면 마음이 다시 스르르 열리곤 했었다. 그 책이 아직도 남아있을까 궁금해 책장을 살폈다. 여러 권의 시리즈 중 한 권만 남아 있었다.


Chicken Soup에는 여러 사연들이 담겨있었다. 암 선고를 받고 치료 중인 이야기, 파탄난 경제를 딛고 일어선 이야기, 마약의 수렁에서 헤쳐 나온 이야기 등 갖가지 역경을 이겨낸 사연들이 많았다. 또한 세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고 위로하는 글도 많았다. 이 책은 발간될 때마다 선생님을 위한 치킨숲, 틴에이저를 위한 치킨숲, 아픈 영혼을 위한 치킨숲, 기적과 치료에 관한 치킨숲 등 독자층을 달리하며 발간되었다. 영혼을 위로하는 다양한 레시피로 이뤄진 Chicken Soup시리즈는 발행 때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책이 많이 팔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만큼 세상에는 위로와 격려를 받고 싶은 존재가 많았던 걸까. 개인주의와 자유를 부르짖으며 나만의 공간에서 주위 간섭 없이 씩씩하게 혼자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였던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외로운, 위로받고 싶은 존재였던 걸까. 손내밀면 거절을 당할까 봐, 사랑했다가 상처 입을까 봐, 말 걸었다 외면당할까 봐 두려운 수많은 영혼들이 사는 세상, 겉으론 용감한 척 살아가는 외로운 영혼들의 집합체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었던 걸까. 외로워서 두려워서 더 안으로 안으로 숨어들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세상일을 헤쳐나가다 힘에 부칠 때 Chicken Soup에 올린 사연들을 읽으며 '나만이 힘든 게 아니었구나' 하는 동지애 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다. 상처받은 치유자란 말이 떠올랐다. 고난을 겪는 사람을 통해 내 상처가 위로받고 치유받게 된 셈이다. 결국 사람은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어 비추며 살아야 하는 존재인가 보다.


아침 식탁에 아픈 몸을 녹여줄 뜨거운 치킨숲 한 그릇과 영혼을 데워줄 Chicken Soup 한 권을 나란히 차렸다. 몸도 영혼도 이 두 치킨숲으로 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상처받아 너덜 해진 곳은 새살이 돋기를, 날카로워진 마음엔 넉넉함이 다시 깃들기를, 원기 잃은 몸엔 울트라 슈퍼파워가 재충전되기를 기대하며 치킨숲을 먹고 읽었다. 힘들어하는 친구에게도 이 두 레시피를 나누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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