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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뜨락에서

가을 깊은 내 정원 2025.11.17

by 류재숙 Monica Shim


아침 식탁으로 환한 가을 햇살이 가만히 걸어 들어왔다. 창가에 가득 핀 국화가 햇살을 받아 노랑빛을 더한다. 달력엔 벌써 가을이 왔다고 떠들어대도, 수그러듬없이 기세등등하기만 하던 태양빛이 단 한 번의 비로 순해졌다.


담배를 끊지 못하던 울산작은아버지가 생각난다. 몸에 해로운 담배 이제 그만 피우시지요 하면 못 피워 안달하느니 그냥 맘껏 피다 가겠노라 당당하던 분이셨다. 그런데 한 번의 가벼운 뇌졸중으로 단박에 담배를 끊으셨다. 뜨거운 태양처럼 열정적이고 강하던 분을 한 번의 비가 순순하게 만들었었다.


지난밤엔 폭우가 내렸다. 첫 가을비의 신고식이 대단했다. 잠을 설칠 만큼 세찬 빗소리에 어디 홍수라도 질까 염려했다. 이번 주 내내 비가 내릴 거라는 일기예보에 오늘은 빗소리를 들으며 아침식사를 하려나 하고 내려왔는데 부엌창으로 햇살이 환하다. 정원으로 나가니 높고 파란 하늘에 흰구름이 두둥실이다.


정원 한편 감나무에는 수확하고 남은 감들이 붉게 익어 새들을 유혹하고 있다. 가만히 보니 가을비로 감잎에 단풍이 들고 있다. 우리 집에서 가장 예쁜 단풍을 보여주는 나무다. 해마다 이웃과 나눠먹을 만큼의 수확을 안겨주어 또한 고마운 나무다.


귤나무에는 가지 가득 달린 귤들이 폭우로 쳐진 나뭇가지에 무게를 더한다. 천상 어미 젖꼭지에 줄줄이 매달려 젖을 빠는 강아지 모습이다. 어미 젖꼭지를 놓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강아지들처럼 귤들이 세찬 비바람에도 떨어지지 않고 조롱조롱 매달려있다. 무게에 치여 가지가 목을 늘어뜨린 채 처져있다. 어미의 짐을 덜어주려 막대기를 가져다 받쳐주었다.


그 옆으로 귤나무 한그루가 더 있다. 웬일인지 꽃을 가득 피우고도 통 열매를 지키지 못하고 낙과되어 버린 이 귤나무는 잎만 무성하다. 2년째 일어나는 현상인데도 식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나는 원인을 알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너서리 아저씨는 거름에 인 성분이 많으면 낙과가 잘된다고 했다. 해마다 같은 거름을 주는데 왜 한 나무는 열매를 가득 맺고 이 녀석은 안 되는 건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나무와 열매하나 맺지 못하고 잎만 무성한 나무가 나란히 있다. 자식을 생산 못한 여인네가 이웃집 아이들 크는 걸 보면 마음 한편이 허허로울 것 같아 나무를 한번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자식 다 소용없어. 무자식이 상팔자여 “ 하던 이웃집 할머니의 말이 위로가 되려나. 가지가 휘도록 매달린 자식들로 몸이 부러지기 직전인 옆나무의 힘겨움이 오히려 위로가 되려나.


작은 나무로 키운다고 무식하게 나무둥치를 뚝 잘라버렸던 대추나무는 몇 해 동안 시름시름 앓았다. 근근이 아픔을 딛고 새 가지를 뻗어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아간다. 올해 몇 알의 대추만 수확했지만 죽지 않고 살아난 것 만도 감사하다. 다른 녀석들보다 가을을 제일 먼저 타는 대추나무는 열매를 내주기 무섭게 잎을 노랗게 물들이더니 벌써 잎의 반을 떨궈냈다. 자식 얼른얼른 키워 내보내고 잎도 털어버리고 홀가분하게 나만의 동면을 준비하는 걸까.


가을이 깊이 내린 내 정원.

이런 날은 친구 불러 차 한잔 앞에 두고 수다를 떨어도 좋겠지만 이렇게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들으며 조용히 바라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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