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4
3년여 동안 내 환자였던 Heather가 클리닉을 찾아왔다. 그동안 고마웠다며 수줍게 뭔가를 건넨다. 봉투 안에 곱게 접은 종이를 펼쳐보니 두장의 디즈니랜드 입장권이었다. 그녀는 디즈니랜드에서 일하고 있다. 디즈니 직원은 가족이나 친구에게 일 년에 몇 장 무료입장권을 줄 수 있는데 일부러 그걸 구해 들고 온 것이다.
그녀는 우수한 대학을 졸업하고도 적성에 맞는 직장을 못 구해 디즈니에서 단순직으로 일하고 있다. 일은 즐겁지만 독립하기엔 수입이 충분치가 않아 계속 구직을 하고 있었다. 사무직자리를 알아 봐주었지만 거리가 멀었고 UCI대학에 적당한 자리가 있는지 머리를 맞대고 함께 찾던 중 다행히 Lab에 자리가 있어 소개해주었더니 이력서를 내 드디어 소식이 왔다고.
환자들을 오랫동안 대하다 보면 건강상담뿐 아니라 연애문제, 가정문제, 직장에 얽힌 문제까지 들고 와 조언을 구할 때도 많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일자리까지 알아봐 주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지 2년이 된 Heather는 매주 화요일 내 클리닉을 찾아와 이런저런 넋두리를 털어놓고 가곤 했다. 엄마는 의사로 성공한 커리어워먼인데 본인은 아직도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어 고민이라고, 남자친구와 얼마 전 헤어져 마음이 아프다고, 자기는 왜 직장에 잘 적응하지 못해 옮겨 다니는지, 학자금 융자도 갚아야 하는데 언제나 페이오프할는지... 나도 저 나이에 저리도 고민이 많았을까 싶을 정도로 고민 많은 청춘이 안스러웠다.
한국에선 부모가 자식의 대학교육까지 전액지원하고도 스펙을 위해 외국 어학연수에, 혼인 할 때는 집마련까지 지원해 주는 걸 보았다. 결혼 후에도 부모가 집을 늘려주고 경제적 도움을 주는 걸 당연시 여기는 한국문화와 미국문화는 차이가 많다. 본인의 은퇴 자금까지 깎아 써가며 끝없는 부모노릇에 지쳐하는 한국의 친구들을 많이 보았다.
미국 사회는 성인이 되면 부모 도움 없이 독립해야 한다는 게 일반화 되어있어 빨리 자리를 잡지 못한 젊은이들이 고민이 많다. 미국에선 대학도 부모가 전액지원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학생 융자를 받든가 다음 학기 학비를 벌기 위해 휴학하고 일하다 다시 학업을 이어나가기도 한다. 그래서 4년제 대학 입학생들의 4년내 졸업 비율이 아주 낮다. 대학졸업 후 생활비에 학비융자금까지 갚느라 빠듯하게 사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이다. 결혼도 본인들이 직접 준비한다.
그런 청년들을 보며 나를 돌아보니 대학졸업 후 부모님께 월급 한번 제대로 못 갖다 드리고 아무 생각 없이 일찌감치 졸업과 동시에 결혼한 게 참으로 죄송했다. 아버지께서 60세가 훨씬 넘은 어느 날 "이제야 너희 오남매 학자금 다 갚았다" 하시던 말씀이 얼마나 충격이었던지.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이 이제껏 우리 학자금을 갚고 계셨구나... 그 이후론 월급에서 한달에 하루는 부모님을 위해 일한다 여기고 꼬박꼬박 용돈을 보내드렸다. 그 돈조차 차곡차곡 모아 우리 아이들 용돈으로 쥐어주시던 아버지. 부모란 무엇인지.
독립해 사느라 열심히 애쓰는 Heather를 보며 "너는 나보다 훨 어른스러워" 하며 등을 두드려주니 무슨 말이냐고 의아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