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홋카이도 2024.2.23
가끔 운명이란 파도가 나를 어디론가 몰고 가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요즘이 그렇다. 작은 뒷동산 높이의 목표를 가지고 시작한 사진 배우기가 어쩌다 점점 깊어져 요즘은 내 시간의 많은 부분을 점령하고 있다. 그저 무엇이든 기록하길 좋아하고 미지의 세계를 찾아다니는 게 좋아 사진기를 들고 따라나서던 출사가 이젠 결과물이 어찌 나왔는지 좋은 사진을 만들려 귀를 쫑긋 세우기까지 하고 있으니 대단한 발전이다.
멀리 사진여행 갈 마음이 있냐는 선배의 물음에 그저 그곳이 눈이 많이 내린다는 이유 만으로 가겠다 했다. 알고 보니 목적지는 내 가벼운 상상을 넘어서는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곳이었다. 혹한에 대비해 갖추어야 할 장비도 많고 튼튼하지 않은 몸이 그 날씨에 적응할지 슬슬 긴장과 염려가 되었다. 출발일이 다가올수록 괜한 만용을 부린 게 아닌가 하는 후회도 스멀스멀 들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새나 눈 사진을 제대로 찍어본 경험이 없어 떠나기 몇 달 전부터 사진 공부부터 다시 해야 했다. 가까운 철새 도래지를 찾아다니며 새 사진 연습은 했으나 도통 눈을 보기 힘든 서든 캘리포니아에서 눈 사진을 연습하긴 어려웠다. 겨울 사진여행의 준비가 충분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겨울을 만난다는, 설국의 한가운데를 찾아간다는 설렘만으로 길을 떠나기로 한다.
겨울은 여름보다 따뜻하다. 씩씩하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갈 수 있는 계절이 여름이라면 겨울은 옆사람의 언 손을 비벼주고 몰아치는 찬바람을 서로 등으로 막아주며 가까이 가까이 함께 걷게 하는 계절이다. 눈보라 치는 삶의 들녘에서 홀로 버텨내기 힘겨울 때, 누군가의 온기가 그리울 때 나는 겨울 풍경을 떠올린다. 가족과 비비대던 겨울날의 구들목을, 언 손을 녹여주던 엄마의 따뜻한 손을, 난로 위에 수증기를 뿜던 커다란 주전자를, 차가운 밤거리에 익어가던 군고구마 냄새를 떠올린다.
태양이 내리쬐는 캘리포니아에 산지 이십여 년, 뜨거운 태양을 끼고 살면서도 낯선 땅에서 한기를 느끼고 살았다. 긴긴 여름날의 산책에서 길을 헤맬 때마다 겨울이 그리웠다. 겨울의 따뜻함이 그리웠다. 혹한의 땅 홋카이도를 찾음은 그 따스함을 찾아 떠난 여행이었는지 모른다.
한 해의 반이 겨울인 곳, 섬나라 일본의 먼 북동쪽에 외떨어진 겨울왕국의 섬, 홋카이도는 오래전부터 내 안에 들어와 똬리를 틀고 겨울이 올 때면 마음 한구석을 들썩이게 했다. 학창 시절 읽었던 몇 권의 일본작가의 책, 특히 빙점과 설국은 내게 이국의 겨울을 가슴에 품게 했다. 홋카이도란 땅은 내게 겨울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 겨울나라에서 뜨거운 온천에 지친 몸을 담그면 어느새 세상을 희게 덮어가는 눈처럼 몸도 마음도 하얗게 다시 태어날 것만 같았다.
눈에 갇혀 세상과 단절된 채 몇 날이고 작은 산골방에서 책을 읽다가 지루하면 눈을 들어 창밖으로 조용히 세상을 덮어가는 눈을 바라보는 곳, 뜨거운 노천 온천에서 차가운 눈을 맞이하는 곳, 오래되어 여기저기 삐걱대는 목조 건물, 깊고 깊은 눈, 정갈한 다다미방, 시간의 향기를 뿜어내는 료칸, 멀리 수증기를 뿜으며 눈길을 달리는 기차... 이런 모습이 내가 그리던 설국, 홋카이도의 풍경이었다.
흰 무희들의 춤을 본 지 언제였던가. 캘리포니아의 겨울도 춥다고 난로를, 털옷을 끼고 사는 내게 과연 홋카이도의 겨울은 어떤 매서운 맛을 보여 줄지. 봄이 달려오기 전, 겨울이 떠나기 전 서둘러 눈을 만나러 가야겠다. 오는 봄을 떠나 시간을 뒤로 거슬러 겨울을 향한다. 오래도록 그리던 겨울나라, 설국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