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사진여행 Day1-2024.2.24
삿포로 뉴치토세 공항은 겨울여행을 온 사람들로 붐볐다. 국제선 출구 도라에몽 인형 앞에서 만나자던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공항 안은 마치 장터처럼 아이스크림가게와 선물가게, 해산물가게 등 각종 가게들이 늘어서 있고 쇼핑객으로 붐볐다. 일본 국내선을 타고 올 선배일행이 보이지 않아 한참을 기다리다 도라에몽 인형이 국내선 출구 앞에도 있다는 걸 뒤늦게 알고 가이드가 모셔왔다.
첫날 일정은 아사히카와로 가는 길에 비에이와 푸라노를 들러 촬영할 예정이다. 공항을 벗어나기 전 축산으로 유명한 도시인 비에이의 우유로 만든 아이스크림으로 설국의 달콤한 첫맛을 보았다. 청정지역 홋카이도산 식재료는 건강하고 맛있기로 소문나있다 한다.
공항을 벗어나니 그야말로 하얀 눈세상이 펼쳐졌다. 농한기를 맞은 들판은 온통 흰 눈으로 덮여 그곳이 꽃밭이었는지 채소밭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세상이 온통 흰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것만 같은 흑백의 풍경이 이어졌다. 네모난 차창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풍경이 컬러시대를 뒤로 돌려 흑백티브이 시대를 다시 만난 것 같았다. 채색 없이 선과 여백만으로 표현된 수묵화, 단순한 몇 개의 선과 그 여백 안에 한없는 상상이 채워질 수 있는 묵화가 홋카이도의 첫인상이었다.
첫 행선지인 오타루를 일정이 바뀌어 갈 수 없게 되었다. 삿포로 근처에서 첫밤을 보내기로 한걸 아사히카와로 숙소를 옮겼기 때문이다. 영화 러브레터의 배경이 된 오타루를 못 가는 게 아쉬웠지만 더 좋은 촬영지를 가기 위해서라는 설명에 따르기로 했다. 오타루는 삿포로의 서쪽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과거 물류를 실어 나르던 상업과 교역 중심지였다. 운하를 따라 물류를 받고 저장하던 옛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티브이에서 보았던 운하 주위를 빛내던 눈으로 만든 등을 보고 싶었었다. 오타루를 찾아온 방문객을 위해 많은 봉사자가 매일 커다란 통에 눈을 꼭꼭 눌러 담아 등을 만들고 그 안에 초를 밝혀 운하 주위를 밝힌다 했다. 눈과 불의 만남이라니. 눈등 안에서 타오르는 촛불은 어떤 빛을 피워낼까 기대했었는데 아쉬웠다.
언 강과 그 너머 눈산이 아름다워 다리 위에 차를 세웠다. 카메라를 챙겨 들고 내리니 머리까지 쨍한 한기가 느껴졌다. 눈을 가득 쓴 산들이 서로 어깨를 다둑이며 겨울을 나고 있었다. 은빛 겨울이 눈 앞에 펼쳐졌다. 꽁꽁 얼어버린 강위로 눈이 하얗게 쌓여 강과 길과 산의 경계가 모호하다. 얼음 구멍을 따라 난 발자국만 남기고 강태공은 간데없다. 강바람에 마른 풀들이 눈을 털며 일어났다. 햇살이 흰 강을 비추고 파란 하늘로 참새 떼가 날아올랐다. 오랜만에 보는 시린 겨울풍경이 어린 시절 썰매를 지치던 그때의 풍경과 닮아 한동안 회상에 젖게 했다.
눈 덮인 산으로 잎 떨군 자작나무들이 얼기설기 숲을 이루고 있었다. "저 산의 숲이 내 머리숱 같아!" 선배가 성긴 머릿결 같이 듬성듬성한 자작나무 숲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 해가 다르게 성글어가는 서로의 머리숱을 바라보며 우린 웃었다.
홋카이도는 겨울 평균 기온이 영하 8도 이하로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는 일이 많고 때론 영하 40도까지도 내려간다. 비에이와 푸라노는 봄부터 가을까지 화려한 꽃들이 드넓은 언덕 위를 수놓고, 겨울에는 눈으로 덮인다.
인적 없는 농가를 지나고 들을 지나고 언덕을 넘었다. 세상은 온통 희고 고요했다. 겨울나무는 눈 위로 제 그림자를 드리우며 여윈 몸을 비춘다. 붉은여우 한 마리가 환영인사라도 하듯 들판을 가로질러 뛰어왔다. 사람 구경이 신기한지 한참을 바라보다 숲으로 사라졌다.
깊은 눈 속에 인간이 만든 것들은 묻히고 갇혀버렸다. 대신 누구도 돌아보지 않던 풀 한 포기, 나무 한그루, 바위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도심의 잡다한 소리가 사라진 공간엔 바람이 풀잎을 간질이는 소리, 고드름이 커가는 소리, 눈이 나뭇가지를 분지르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흰색은 백지처럼 무의 상태를 연상시키지만 빛이 모두 섞인 색 즉 유의 상태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다 지니고 있기에 더 가질 것도 없는, 아무것도 없기에 더 풍부한 겨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은빛 설경 속에 허허벌판 위 한그루 나무만으로도 겨울 그림이 충만해진다.
해질녘 세븐스타 나무에 다다랐다. 세븐스타 담배광고에 이 나무가 나오며 유명해져 이름 붙여졌다 했다. 눈으로 가득한 언덕 위에 홀로 큰 팔을 벌리고 선 거목, 혹한의 겨울을 온몸으로 견디며 서있는 겨울나무가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나무는 어떤 힘으로 이 겨울을 이겨낼까 생각할 즈음 노란 머리의 한 청년이 나무에게 다가왔다. 어린왕자가 사막의 여우와 대화하듯 그는 나무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어린왕자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네 머리칼이 황금빛이잖아. 네가 날 길들인다면 두근거리는 일이 생길 거야. 이제 황금빛 밀밭을 볼 때마다 네가 떠오를 테니까. 밀밭을 스치는 바람 소리도 사랑하게 될 거고.”
긴 겨울이 가고 봄이 되고 여름이 되어 눈언덕이 황금빛 밀밭으로 변할 때 가슴 두근거리며 서있을 나무를 생각해 본다. 가슴 뛰게 하는 그 무엇을 꿈꾸는 것만으로도 이 길고 냉혹한 겨울을 견뎌낼 수 있으리라.
저녁은 비에이역 근처 코에루에서 먹었다. 일식이지만 우리나라 배추된장국 같은 구수한 국이 언 몸을 데워주었다. 작은 시골역사인 비에이역 앞에서 기념촬영도 했다. 철 지난 크리스마스장식을 단 나무가 달빛아래 역 앞을 밝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