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day2- 2024.2.25
일출사진 촬영을 위해 이른 새벽 길을 나섰다. 동트기 전 세상은 깜깜한데 눈으로 덮인 대지는 달빛을 품어 하얗게 빛났다. 밤의 밑바닥이 하얗다던 설국의 첫 구절이 떠올랐다. 기온은 영하 18도로 떨어져 있었다. 아사히카와의 새벽은 눈치우는 차만이 깨어 눈을 치우느라 분주했다. 가장 두꺼운 옷에 내복까지 입고 털신에 모자에 장갑에 일회용 손난로까지 완전무장을 하고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메고 나서니 영락없이 전장에 나가는 군인 모습이다.
새벽을 달려 어제 들렀던 세븐스타 나무 옆 가로수를 향해 삼각대를 펼쳤다. 눈쌓인 언덕 위로 잎 떨군 가로수들이 언 손을 서로 잡고 나란히 서 있다. 눈이 무릎까지 푹푹 빠져 언덕을 걸어 오를 수 없어 길 가장자리에 일렬로 삼각대를 세웠다. 세상은 아직 잠들어 있고 혹한의 밤을 세운 겨울나무들만이 깨어 떨고 있었다. 새벽 찬공기의 매서움이 쨍하니 귓가에 전해졌다. 마스크를 통해 들어온 공기는 입김으로 나갈 때면 얼어버렸다. 이 이른 새벽 오직 한 순간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이리 부지런을 떨다니. 어둠도 혹한에 얼어버린건지 동틀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새벽 바람과 추위를 견디며 해가 머리를 내밀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일각(一刻)이 여삼추(如三秋)였다.
잠시 후 하늘이 붉어지며 여명이 눈언덕을 밝히기 시작했다. "불 들어온다." 이 순간을 고대하던 누군가가 소리쳤다. 언덕 위 늘어선 가로수들 사이로 붉은 해가 오르기 시작했다. 혹독한 겨울밤을 지샌 나무는 차라리 불덩이라도 부여잡고 싶었을까. 일렁이는 해가 잎 떨군 나뭇가지에 걸려 한동안 헤어나질 못하더니 잠깐 사이 나무는 불을 뒤집어 쓴듯 붉은 태양을 품고 타오르기 시작했다. 둥근 불덩이가 나뭇가지를 벗어나려 몸을 흔드는가 싶더니 어느새 나무 위로 둥실 솟아올랐다.
마을이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눈들판에 드문드문 홀로 자라는 어린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눈으로 덮인 허허벌판에 한 그루 어린 나무가 빚어내는 아우라는 성스럽기까지 하다. 언젠가 큰 나무가 되리란 꿈 하나 품고 이 혹독한 겨울을 묵묵히 견뎌내는 그들의 의지에서 생명의 경외심이 느껴진다. 한 그루의 나무로는 숲을 만들지 못하지만, 저 홀로 우주를 떠받치고 세월을 견뎌내는 겨울나무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마일드 세븐 언덕 위에 가지만 남은 겨울나무들이 부채모양의 숲을 이루고 있다. 부채나무 숲은 언덕 위에 고고히 버티고 선 선비의 모습이다. 눈덮인 하얀 언덕과 하늘을 향한 검은 숲의 절제된 어울어짐이 일순간 숨을 멎게 했다. 눈 앞의 풍경이 주는 묘한 매력에 이끌려 한동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단순한 풍경에서 함축된 의미를 찾아냄은 작가의 몫이다. 빛에 따라 변화하는 피사체를 작가의 시선으로 포착해 나만의 작품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같은 피사체를 담아도 작가마다 다르게 표현되는 이유다. 아마추어인 내겐 아직도 어려운 과제이다..
빛의 화가 모네는 연못, 노적가리, 루앙성당 등 같은 대상을 빛의 변화에 따라 연작으로 그렸다. 같은 대상임에도 빛에 따라 마치 다른 대상을 그린 듯 달라보였다. 사진은 빛을 담는 예술이다. 모네가 현대를 살았다면 사진작업에 매료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부채나무숲은 개인 소유 경작지에 있어 숲 가까이 가기가 어려웠다. 세계에서 몰려오는 사진가들 때문에 농장주인은 골머리를 앓는다 했다. 신발에 묻어온 균이 농작물을 망치게도 한다하니 경작지 안으로 발을 딛지 않으려 애썼다. 사진 촬영이란 어찌보면 참 이기적인 활동이다. 내 작품을 위해 때론 들에 핀 꽃을 의도치 않게 짓밟기도 하고 파파라치처럼 동물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촬영하다보면 때론 그들의 휴식을 방해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 속에 위대한 예술 작품이 탄생하기도 하니 가장 이기적임이 가장 이타적이란 말에 위안을 삼아야 하는걸까.
아침 햇살에 눈언덕이 보석을 뿌린 듯 반짝였다.. 농장 옆을 돌아가니 마른 나뭇잎과 가지에 상고대가 맺혀있었다. 역광으로 빛나는 가지에 얼음가시가 잔뜩 돋아있다. 카메라에 담아 확대해 보니 뾰족한 얼음 결정체가 가득했다.
푸른 상록수 한그루가 홀로 눈언덕 위에 서서 독야청청을 부르짖고 있다. 크리스마스 트리라 이름붙은 나무다. 흰눈으로 덮인 캔버스에 초록나무가 두드러졌다. 카메라에 열심히 담고있는데 맑던 하늘에 갑자기 안개가 몰려와 나무 주위를 에워싸더니 삽시간에 나무가 희미한 형체만 남았다. 혼탁한 세상 속에서 독야청청하리란 의지를 지켜내기는 쉬운 일이 아닌걸까. 다행히 시간이 안개를 걷어갔다.
일출 사진을 위해 호텔 조식을 포기하고 나와서 배가 고팠다. 눈벌판에 몇시간 서있는 것만으로도 에너지 소모가 상당했다. 우동 한그릇으로 한끼를 해결하고 종일 비에이와 푸라노 이곳저곳을 다녔다. 영화배우 후보를 물색하러 길거리 캐스팅에라도 나선듯 카메라에 담을 멋진 나무들을 찾아 다녔다. 우리가 촬영한 나무가 어느날 유명세를 탈지도 모를 일이다.
햇살을 받아 빛나는 상고대 안에 여린 가지가 갇혀 있었다. 어릴적 읽던 안델센 동화 눈의 여왕이 떠올랐다. 눈의 여왕의 마법에 홀려 얼음궁전에 갇혀있던 카이가 거기 있었다.. “염려마 곧 봄의 정령처럼 따뜻한 겔다가 너의 탈출을 도우러 올거야”
겨울 가로수들이 손에 손에 눈꽃을 들고 목을 길게 뽑은 채 아직도 먼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