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day2-2024.2.24
아사히카와는 일본의 최북단 섬인 홋카이도의 내륙에 위치한 도시다. 한때 일본에서 가장 춥고 눈이 많은 도시였으나 도시가 건설되면서 영하 41도까지 갔던 기온이 지금은 영하 20도 정도로 상승했다한다. 영하 41도의 날씨는 과연 어떤 느낌일까.
여행을 준비하다 아사히카와에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 문학관이 있는 걸 알게되어 꼭 방문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사진을 위한 여행이라 문학관 방문이 예정된 일정에 없었기에 일행에게 누가될까 조심스레 의견을 타진했다. 고맙게도 모두 혼쾌히 동의해주었다. 숙소에서도 10분내 거리에 있어 기존 일정에 큰 차질을 주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사히카와는 미우라 아야코가 태어나 살았던 도시다. 학창시절 소설 '빙점'을 통해 처음 들어 본 도시였다. 어디에 있는 어떤 도시인지 궁금했지만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바로 찾을 수 없던 시절이니 막연히 일본 어딘가에 있는 상상의 도시로 마음 속에 남았었다.
'빙점'은 1964년 아사히 신문사가 주최한 창간 85주년 기념 현상 소설 공모전에 당선되며 그녀를 유명작가로 만든 작품이다. 당시 일본 전역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만큼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드라마로 각색되어 인기리에 방영되기도 했다.
어린 시절 동경했던 작가의 문학관을 방문한다는 일이 마음 설레게 했다. 문학관은 소설의 배경이 되는 비에이강 옆 자연휴양림 초입에 있었다. 하늘로 뻗은 키 큰 나무들이 희고 자그마한 문학관 건물을 에워싸고 있었다.
"이랏샤이마세" 입구에 선 안내인이 깍듯이 인사를 했다. 난 그녀가 마치 미우라 아야코라도 되는듯 반갑게 손을 잡으며 45년전에 책으로 만났던 작가를 찾아오게 되었다며 들뜬 마음을 전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그러냐며 이렇게 먼길을 잊지않고 찾아줘서 고맙다며 머리숙여 인사를 했다.
1922년 4월 25일 아야코는 홋카이도 아사히카와에서 태어났다. 9남매 중 다섯째 아이였다. 1939년 아사히카와 소서학교에서 7년간 교사생활을 했다. 일본의 2차세계대전 패전 후 그녀는 군국주의 교육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에 빠졌다. 그동안 아이들에게 열심히 가르쳐 온 내용이 사실이 아님을 알게되면서 회의와 혼란에 휩싸였다. 그때까지 정의롭다 생각한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 실상은 수많은 사람을 억울한 죽음으로 몰았고 이웃나라를 황폐하게 만들었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잘못을 했다면 머리를 조아려 사과해야 하며 할복한 군인들처럼 교사들도 학생들 앞에 죽음으로 사과해야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고 한다. 거짓을 가르쳐온 죄책감에 그녀는 교단을 떠난다.
미우라 미쓰요와 결혼해 부부는 잡화점을 운영했는데 가게가 번창하여 이웃 가게들이 장사에 지장을 받을 정도였다. 남편의 권유로 가게 규모를 줄이고 남는 시간에 글을 썼다한다. 부의 집착보다 이웃에 대한 배려를 택한 덕에 그녀의 재능이 빛을 보게 된 셈이다. 잡화점에서 돈벌기에 급급했다면 후대에 길이 남을 그녀의 귀한 작품들은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터이다. 그후 그녀는 폐결핵과 파킨슨병으로 오랜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글쓰기를 지속했다.
이곳을 방문하기 전 중학교시절 읽었던 소설, 빙점을 다시 찾아 읽게 되었다. 예전에 이 책을 읽었던가 의심이 들 정도로 마치 처음 읽는 책처럼 생소하게 느껴졌다. 사람의 기억이란 어찌나 얕은건지 그 얕은 기억이란 힘에 의존하고 살면서도 내가 옳니 네가 옳니 시시비비를 가리며 사는구나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소설 빙점은 이야기 전개도 흥미로웠지만 인간의 본능을 다루는 그녀의 글 솜씨와 인물의 심리묘사가 뛰어나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의 글은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게 하는 흡인력이 대단하면서 인간의 드러내고 싶지 않은 본능을 건드리고 있었다. 인생을 한참 산 지금에야 깊이 이해되는 내용이 많았는데 중학생시절 나는 어떤 생각을 하며 이 작품을 읽었을까.
이 소설의 배경에는 아사히카와 부근의 비에이 강가, 북위당서점, 아사히카와 소학교, 도야호, 하코다테 항구 등이 등장한다. 지도에는 문학관 앞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가문비나무숲을 지나 비에이 강으로 다다르게 되어있었다. 나쓰에의 어린 딸 루리코가 살인자와 함께 가문비나무 숲길을 지나 비에이 강가에서 살해되고 나쓰에 부부가 딸을 찾아 이 길을 지나고, 그후 남편 스지구치가 아들 구로와 함께 이 길을 걸어 강가에서 폭죽을 터뜨린다. 마지막엔 입양한 딸 요코가 자신이 살인자의 딸이었음을 알고 이 길을 지나 비에이 강가에서 자살시도를 한다.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갈등을 짊어지고 걷게 되는 이 길은 인간 군상들의 삶의 여정과 닮아 보였다. 인간의 인생 여정이란게 각자 다른 길을 가는 것 같으나 궁극적으로는 모두 동일한 과정을 거쳐 막을 내리는 것이지 않겠는가.
소설 전반에 걸쳐 등장 인물들은 상대에 대해 끊임없이 짐작만 하고 정작 마음을 드러내 대화하지 못함으로 오해와 비극을 초래한다. 이들이 대화를 통해 오해를 풀어갈 수 있었다면 물이 얼음으로 바뀌는 빙점을 피해 해빙의 상태를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누구나 ‘여기가 한계야’ 하는 순간의 벽, 빙점을 마주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 빙점에 직면할 때 너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하고 작가는 묻고 있는 듯했다.
1994년경, 가도카와쇼텐으로부터 자서전을 써 주었으면 좋겠다 라는 의뢰를 받은 아야코는 파킨슨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자전 에세이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를 구술필기를 하며 집필하였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그녀는 1998년 6월13일 미우라 아야코 기념 문학관 개관식에는 참석하였으나 다음해 10월 12일 77년의 생애를 마쳤다. 미완성인 작품을 남편 미쓰요가 후기를 써서 1999년 12월 '내일을 노래하리 생명이 다할 때까지' 가 간행되었다.
문학관에는 그녀의 친필 원고와 그녀가 쓴 책들, 사진이 정갈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문학관 옆 그녀의 집필실엔 책을 가득 안은 책꽂이와 평소 그녀가 쓰던 책상이 다다미 위에 단정히 놓여 있었다. 이 자리에 앉아 수많은 이야기를 상상하고 밤낮으로 글을 썼을 그녀의 시간들을 떠올려 보았다. 많은 작가들이 그녀처럼 힘든 생을 살면서도 끝까지 글쓰기를 놓지 못하는 걸 본다. 무거운 바위를 산꼭대기로 끝없이 굴려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처럼 죽을 때까지 글을 써야하는 천형을 받은 자가 작가인걸까 하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전생에 어떤 업을 지은 자가 작가로 태어나는 걸까. 이런저런 상념에 잡힌 내게 안내인이 다가와 사진에 담아줄테니 집필실 앞에 앉아보라 권한다.
긴 겨울을 가진 홋카이도는 글쓰는 이에겐 더없이 좋은 곳일지 모른다. 혹한의 바깥세상과 철저히 고립되어 온전히 내면의 세계를 향할 수 있지 않겠는가. 외부에 방해 받음없이 내 작업에 온전히 집중할 시간이 주어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시간이 더 허락한다면 소설 속에 나오던 비에이강 가도 거닐고 가문비나무 숲도 거닐다 오고 싶었다. 다음에 다시 올 기회가 있겠지 하고 아쉬운 마음을 달래었다. 무엇보다 만나고 싶은 인연을 긴 세월을 거슬러 이렇게 만날 수 있음이 기뻤다.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결정체를 가진 눈이 내린다는 아사히카와에는 눈의 미술관이 있다. 이곳에서 눈에 관한 다양한 자료와 수많은 눈결정체의 전시를 볼 수있다. 눈 결정체는 기온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며 적절한 온도라야 아름다운 결정체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눈은 '겨울의 에페메랄 Ephermeral', '짧은 순간 피는 꽃'이라 했다. 한순간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사라지는 눈꽃, 미우라 아야꼬의 삶도 그런 눈꽃을 닮아 보였다. 짧은 순간 일지언정 절정의 아름다움을 발하는 눈꽃을 닮고 싶단 생각을 하며 문학관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