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이어주는 또다른 인연(因緣)
나는 현재 미국땅 제일 서쪽, 천사의 도시라 불리는 곳에 산다.
유학으로 시작한 미국 생활은 동부에서 서부로, 서부에서도 이곳저곳 다른도시로, 한동네에서 블럭 사이로, 한 빌딩내에서 다른 유닛으로.. 지난 25년간 수많은 이사의 횟수로 점철되었다.
부모곁을 떠나 낯설고 먼 땅으로 오던때부터 세상살이가 만만함과도 멀어졌지만 , 이 너른땅에서도 내 짧은 몸땡이 누일 자리 하나 마련하는 일이 이리 단내나는 인생스토리가 될지 나는 몰랐다.어릴적 부모님과 이사를 할때에는 매번 조금 나은곳으로, 더 좋아지는 형편이 눈에 보이게 이사를 했어서인지 이사한다는 것 자체가 설레이고 즐거운 기대를 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혼 후 나의 삶은 이사를 더 이상 기대하거나 희망과 맞닿아 생각하게 되지는 않았다. 내가 장사를 한다고, 남편이 사업을 한다고 벌렸던 일들이 돈을 벌어주는 일이 아니라 까먹는 일이 되면서 우리는 더더욱 이사에 이사를 거듭하게 되었으며 ,형편에 닿는 새로운 살곳을 알아보고, 계약을 하고, 이사짐을 싸고 푸는 동안의 힘듦은 정말 ... 심신이 괴로왔다.
흔히들 말하기를 공항에 내렸을때 마중나온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이민후 직업이 결정된다고 할만큼 사람과의 인연이 중요한것이 타국에서의 삶이라고들 하지만, 생각해보건대 매번 삶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 새로운 자리로 떠밀리듯 이사를 감행할때마다 내 삶의 꼬리를 잡고 끈덕지게 함께하는 내 "물건" 들과의 인연또한 사람과의 인연보다 덜 중요하다 말할수는 없었다 .
그러나 몇년에 한번씩 이사를 할때마다 구석구석에서 나오는 짐의 양이란 실로 엄청나서, 박스를 끊임없이 만들어 채워도 물건들은 바닥에서 널부러져있고, 줄지어 나도 데려가라며 뛰어나오는 이 물건들의 행렬은 , 이삿날이 가까울수록 모두 처분하고 싶은 짐이되어 갖다 버리고 싶은 충동마저 들게 하는거였다.
평화로이 모든 살림을 품고 즐기기만 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한 집에서 신혼으로 시작하여, 손주까지 봐주며 살수 있도록 인연이 닿았다면 얼마나 좋았으랴.
그렇지만 내 모든 물건들은 나와의 인연이 닿음으로 내 역마살을 나눠지고 같이 돌아다니게 된 것이다.
나는 아름다운 물건을 좋아하고( 대부분 그렇겠지만), 물건의 소용에 따라 한번 인연이 닿으면 그 즐거움이 새록새록 하여, 쉽게 다른것으로 바꾸는 일은 거의 없다. 그리하여 어떤 물건을 들이기 전에 고심하고 , 상상한다. 그 시간들은 또 얼마나 즐거운 일이던지!
그러나 그렇게 지난 추억들로 맺은 사랑스러운 인연들이 이사가 결정된 이후로는 괴로운 짐으로 보이기 시작 하는 것이다.
하나 하나 싸기전에 버릴것이냐, 함께 할것이냐를 두고 고민을 한다. 이미 그것은 집안에 들일때와 같은 즐거운 고민이 아니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큰 소용에 닿았던 때와 혹은 그로인해 즐거웠던 순간들을 기억해보는것이다.
그 가격은 잊은지 오래이지만 함께한 세월동안의 값어치를 나혼자 떠올려보는것이다.
짐꾸리기란 그래서 나에게 참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깊숙히 넣어두었던 지난날의 추억들이 나의 물건들에게 덧입혀져 있다가 정리를 해야할 시점이 오는 날에 다들 나에게 항변하는것이다.
아버지가 보내신 첫 편지같은 작은 덩치들부터 식탁위를 밝혀주던 예쁜 나의 샹들리에와 가구들까지.
가능한 나는 오랜동안 이 모든 나의 살림들을 끌고 다녔다. 하나도 포기할수 없이 나의 분신 같았다.
집에 들여 소유로 품기까지 누구와, 어디에서 , 어떻게 그 물건과 인연맺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보면 사람과의 인연을 정리하듯이 자꾸 뒤돌아 보게 되고 돌이켜보게 되는거였다.
물건들은 때로 선물로 들어온 것들이었다. 그런경우 그건 그냥 물건이 아니라 " 김동생이 집들이때 준 쟁반"이어서 나에게는 쟁반아닌 김동생이 더 떠올라 도무지 버리거나 할수 없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런 감상어린 추억들은 냉정한 현실앞에서는 늘 맥을 추지 못하고 결정을 종용하는 남편의 재촉앞에서 운명을 결정짓곤 하였다. 그렇게 살림이 더욱 단촐해져야만 하는 궁색국면에서는 추억조차 고르고 골라야 하는것인데, 단시간 종용에 의한 결정은 나를 매번 후회하게 하고, 후회했던 기억은 또다시 물건을 들고 고민하게 하는 것이었다.
안되겠다, 매번 이렇게는.
어떤 기준으로 이 물연을 마무리 할것이냐하는 고민을 시작하였다.
이사를 끝낼수 있다는 희망이 멀어질수록, 물연을 정리하고 단촐해지고 싶은 생각이 짙어졌다.
그것은 아마 중년의 절정으로 치닫는 나의 나이탓도 있을것이고, 거듭되는 이사로 인해 몸과 마음이 고생에 겨워 그 물연을 품고 돌이켜보기에 여유롭지 않은 탓도 있을테지만,
여튼 짐을 꾸리던 어느 저녁, 나는 가벼워지고 싶었다.
더 좁은 장소로 이사를 거듭하던 어느 순간에.
인생이, 생활이, 생각이,간단해지고 단순해지고 싶었다.
물건이 나에게 말해주는 크고 작은 기억들이 "나"의 인생이되는것이 아니라, 내가 "나"이면 그걸로 된것이므로.
이제 이 아이들을 어찌한다?.....
물건이라는것이 때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변하면서 그 소용의 가치가 달라지기 마련이어서, 어떤 물건들은 다른주인을 찾아주는것이 참으로 수월하지만 어떤 물건은 그 소용가치를 떠나 정말 자식을 내보내듯 아끼고 사랑해주고, 즐거워 할 사람이어야했다.
나는 물건들의 만들어진 용도를 먼저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을 떠올려보았다.
장식품의 경우 나의 친구들 중에 비숫한 취향을 가진 이들을 기억해냈다. 아이들 용품은, 늦둥이들을 낳아 키우는 친구들과 동생들에게 갔고,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이사에 포함될수없는 덩치큰 탁자와, 앤틱 장식장은 처음에 중고품 파는곳에 올렸지만 그 값어치를 너무나 후려치는 알뜰한 살림꾼들의 손에 ,차마 맡기지 못했다.
돈때문이 아니었다.
나를 기쁘게 해주던 것들에게 나는 예의를 다 하고 싶었다.
물건들과의 이별이 나의 추억과의 이별은 아니었으나, 나와 함께 바다를 건너고 대륙을 지나며 무엇보다 오랜시간동안 나와 함께한 그것들에게 새로운 주인과 더불어 용도를 다하는 기쁨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쓸모"를 발휘할 뿐아니라, 빛나게 되기를 바랬다. 나에게 와서 빛났던 것처럼.
그래서 팔지 않고 선물을 하기로 했다.
그 크리스탈 샹들리에는 사랑하는 친구네 집 현관 천장에 보냈고, 장식장은 나처럼 앤틱을 좋아하는 아끼는 동생네 부부가 귀하게 모셔갔다. 유럽여행중 벼룩시장에서 사고 남편에게 욕을 먹었던 빈티지타자기와 카메라는 카페를 하는 친한동생네 가게에서,커다란 원목 커피테이블은 손님 많이 치르는 친구에게, 아이들 이층침대는 연년생 딸을 둔 친한 동생네 집으로..
각각 그 가정들로 보내어질때 기쁜 맘으로 보냈고, 서운함 보다는 그곳에서 새로이 쓰임받으며 기쁨을 주는 물건들이 될거라 생각하니 내 마음이 위로가 됬다..
남은 물건들에 대해서도 나는 중복되는 물건들과, 쓰임새보다는 모양새에 치중한 아이들을 골라냈다.
비싸고 귀해서 되려 보기만 하고 쓰지 못했던 물건들을 추려내고 나니 나의 살림살이는 반으로 줄어들었다. 손님들치르느라 필요했던 많은 그릇들, 은식기도 각 소용에 닿는 사람들에게 선물했다.
그렇게 모으고 모으기만 했던 물연들이 흩어져갔다.
하지만 흩어진 물연物緣들은 나의 소중한 사람들과 나를 더한 인연 因緣으로 묶어주었다. 이따금씩 그들과 연락이 되거나 혹은 만나러 갈때, 그곳에서 빛나고 있는 그 물건들을 보면 새로이 본듯 반갑다.
그 물건으로 인한 즐거웠던 기억들이 줄줄이 떠올라 지난 시간들이 감사하고 , 오늘 살아서 만나는 만남이 또 감사하다.
살아있으니 필요로 하는것도 계속 달라지고 또 생기지만, 나는 이제 전처럼 쉽게 물건과 인연맺지 않으려 애쓴다. 있는 물건을 다용도로 써보고, 없으면 없는대로 살기로 한다.
단촐한 삶의 재미를 알게되었다고 해도 좋겠다.
진짜 삶의 재미와 깨달음을 ,풍요에서 오는것이 아니라 결핍에서 시작 한다는것을 배웠다고 하면 이 거대한 자본주의의 나라에서 실패를 거듭한 이민자의 궁색한 변명으로 들리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