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수개월 동안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작은 마을, 메주고리예에 머물렀다. 세상과는 동떨어진 참으로 시간이 느리게 가는 그런 마을이었다. 숙소를 나오면 보이는 건 산과 들뿐, 건물이라야 자그마한 성당과 마을, 호텔들 뿐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해 먹고, 오후엔 매일 미사 전례에 참여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루는 산을 오르거나, 다른 하루는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기도하면서 지냈다. 할 일이 많지 않다 보니 때로는 지루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런 시간들이 이상하리만큼 더 편안해지고, 자유로웠다. 먹는 것도, 볼거리도 풍성하지 않은 곳에서 지극히 본능에 충실한 시간을 보낸 우리는 그동안 서로 모르고 지냈던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진짜 '나'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물다 보면 꼭 만나게 되는 순례자들이 있다. 가볍게 인사만 나누기도 하고, 때가 맞으면 밥도 먹고 대화도 나눈다. 그러다 우연히 충고의 고수를 만나게 되었다. 마치 나를 꿰뚫어 보듯 진심 어린 충고. 진짜 제대로 말이다.
'뭐든 할 수 있다!' 이거 지나치면 병이 된단다. 우선은 다 할 수 있다고 큰소리 뻥 쳐놓고 잘 되면 다행, 아니면 수습이 될 때까지 끙끙 속앓이. '이런 마음가짐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라는 거다. 자신감을 넘어서 자만이 될 수도 있고, 뭐든 지나치게 다 맡으려는 <책임 과부하>가 걸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남 얘기가 아니었다. 바로 내 얘기였다. 씁쓸하지만 기막히게 딱 맞아서 빼도 박도 못하는 싱크로율 100퍼센트의 내. 얘. 기.
책임 과부하가 걸린 난 뭐든 해 보려는 것이 아니라 뭐든 해내야 했다. 안될 수도 있는 일에 끙끙, 안 되는 일에는 더 끙끙댔다. 알고는 있었지만, 유독 나에 대한 지적이나 충고가 정확하면 할수록 그런 말들은 상처로 남아 많이 속상했다. 그런데 진짜 나를 나보다 더 진실 되게 볼 줄 아는 충고의 고수를 만나게 된 것이다.
'왜 네가 다 하려고 하니? 네가 왜 다 책임지려고 해. 왜 맡기질 못하니. 왜 자유롭질 못해' 이렇게 아픈 부위 정확하게 짚어서 찔러대 놓고,
일상에 파묻혀 살다 보면 조금씩 자신의 모습을 잃어가는 것 같다. 일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일상에선 괜히 마음이 바쁘다. 진짜 자신을 마주한다는 건 사치일지도 모르는 일상의 삶은, 여행을 떠나 바라보면 참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삶을 사는 목적은 결국 행복인데, (누구나 행복의 기준이 다르겠지만)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지 우리는 자주 잊고 살 때가 많은 것 같다.
적어도 내 기준엔 진짜 자신을 안다는 것만큼 행복한 건 없다. 진짜 자신을 아는 것에서 오는 자유로움은 단순히 일상을 벗어난 자유로움이 아니다. 나를 제대로 알고, 나답게 사는 것,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여행에서 겪는 지독한 외로움, 육신의 지침, 반복된 낯섦에서 오는 정신적 피로도 결국 이 자유로움을 위해 견딜 수 있고, 그 후에 갖게 되는 자유는 진짜 내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충고의 고수를 만난 후 남은 순례기간 동안 나는 커피 한 잔에 여유로움을 즐겼다. 흙바닥에 그냥 앉아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듣고 싶은 음악을 들으면서 달콤한 꿈을 꿨다. 기도하는 시간엔 온몸에 힘을 빼고 물 위에 떠 있듯 시간의 흐름에 나를 맡겼다. 있는 그대로를 사는 자유로움. 나다움이란 또 다른 이름이었다.
처음엔 무척 낯설고 적응하기 힘들었던 보스니아에서의 시간. 부끄럽고 인정하기 싫지만 용기 내어 마주했던 나의 민낯.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지만 결국 받아들였고, 나조차 이해할 수 없었던 그간의 상처들을 스스로 이해해주며 어루만졌다. 진짜 나를 찾았던 시간, 익숙함을 벗어난 지독히도 낯설었던 시간과 공간이 내게 준 깜짝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