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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charlie Jul 18. 2019

2019년의 대한민국과 94년의 타이베이

<애정만세>

오래전 다녀온 대만의 여름은 대구의 여름과 많이 닮았다. 뜨거운 햇살과 찌는듯한 습기, 밤이 되어도 식을 줄 모르는 열대야의 기억으로 가득하다. 생각해보면 날씨만이 아니다. 중국과의 이념 대치,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한 점 그리고 독재정권의 역사 역시 유사하다. 대만영화를 보면 정서적 교감을 느낄 때가 많은 이유다. 차이밍량 감독의 <애정만세>가 그러하다. 94년 제작된 작품이지만 지금 다시 보아도 현재의 우리 정서에 이질감이 없다.

     타이베이의 밤은 길다. 번화가에는 수많은 인파가 새벽까지 오간다. 야시장의 손님은 끊이지 않는다. 해가 진 후에는 다시 해가 뜨기 전까지 마치 자신이 낮과 다르다고 믿는 듯하다. <애정만세>는 타이베이의 새벽 밤을 헤매는 세 남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납골당 판매원인 소강은 우연히 빈 아파트에 꽂혀있는 열쇠를 가져온다. 집이 비어있음을 확인하고 수시로 오가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부동산 중개인으로 일하는 메이는 늦은 밤 처음 만난 아정과 빈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홍콩에서 사 온 옷을 파는, 정해진 거처가 없는 아정은 메이의 열쇠를 몰래 훔쳐 빈 아파트를 드나든다. 메이는 빈 아파트를 구매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드나들고, 이렇게 세 남녀는 빈 아파트를 두고 서로 모르게 드나들며 외로움을 달랜다.

인파 속 우연한 만남

     영화는 시작한 지 20분이 되어서야 첫 대사를 토해낸다. 그동안 음악마저 흐르지 않는다. 그마저도 메이가 집을 고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약속을 잡는 내용이다. 영화 내내 나오는 몇 안 되는 대사 중 인물 간의 관계나 성격을 드러내기 위한 대사는 없다. 세 사람이 끊임없이 피워대는 담배가 말을 대신하는 듯하다. 가족이나 친구같이 사적 영역의 인간관계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말보다는 그저 묵묵히 보여주는 그들의 일상에서 쓸쓸함과 외로움은 극대화된다. 세 사람은 군중 속에 있지만 섞이지 못한다. 각자가 하나의 섬과 같다.

     섬나라인 대만이기에 부동산은 관심의 대상이다. 경제성장으로 인해 집중된 부동산 투자는 수많은 빈집과 미분양 고층 아파트를 양산했다. 수용한계를 넘은 묘지로 인해 생긴 고급 납골당에 투자와 관심은 다른 형태의 부동산 열풍이다. 홍콩을 오가며 불법 노점상을 하는 젊은이에게 안정적인 거처는 돈으로 살 수도 없고 무의미하다. 자신의 납골당 위치에 더 관심 있는 기성세대는 자신들이 쌓아 올린 고층 건물에 자부심을 느끼지만, 그곳에 들어가 살지 못하는 신세대에 대해선 무관심하다. 북에 가로막혀 사실상 섬과 같은 우리나라 역시 다르지 않다.

채울 수 없는 쓸쓸함

     아장은 그리움에 메이에게 연락하지만, 메이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그들의 섹스는 배출의 수단 혹은 일시적 채움의 수단일 뿐이다. 애정이 동반된 관계가 아니다. 종일 매매가 이뤄지지 않는 고급 아파트와 저택을 소개하지만, 자신은 정작 보일러가 고장 난 집에 사는 메이는 외로움에 아장을 다시 찾는다. 게이인 소강은 빈 아파트에서 홀로 여장을 하며 마음을 달랜다. 그렇게 세 사람은 서로가 모르게 다시 한 공간에 모이게 된다.

     세 사람은 늘 혼자 식사를 한다. 식사는 허기진 자신을 채우는 수단이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중화권 영화에서도 상대의 안부로 늘 묻는 말이 밥은 먹었냐는 말이다. 메이는 늘 길거리 음식이나 도시락으로 급하게 식사한다. 느긋하고 여유롭게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는다. 소강은 물이나 커피를 마시지만 정작 식사하는 모습은 그려지지 않는다. 아정 역시 캔맥주를 마실 뿐이다. 빈 아파트에서 마주친 아정과 소강은 친구가 되고 둘은 같이 영화 속 유일하게 제대로 된 식사를 한다. 메이와 아정이 다시 만난 장소 역시 길거리 음식점이다. 둘은 같이 야식을 먹으며 감정을 교환한다. 같이 밥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식사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음식을 나누고 마음을 나눈다.

     소강은 자신의 감정을 아정에게 표현하지 못한다. 그와 아정의 관계는 결국 서로가 만족하는 사이가 되지 못할 것이다. 메이는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아정과 섹스를 하지만, 하룻밤이 지나면 여전히 느끼는 공허함에 결국 울음을 터트린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애정이다. 친구로서의 애정 혹은 연인으로서의 애정, 그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것을 거부한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애정을 가지기에는 너무 각박한 현실 속에 있으며, 혼란스러운 정체성이 발목을 잡는다.

결국 터지고 만 눈물

     우리나라에서는 출산을 포기하고 결혼을 포기하고 연애를 포기하더니, 요즘은 친구 만나기를 포기하는 경우까지 갔다. 영화 엔딩의 6분여의 롱테이크에 담긴 메이의 울음이 애처롭고 공감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90년대 초반의 대만을 그린 <애정만세>는 메마르고 삭막하고 출구 없는 답답함을 그린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빈 아파트로 들어가는 열쇠가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을 벗어날 출구를 여는 열쇠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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