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생각나는 원두는 대체 어떤 맛인가요?
'해변에서.'
핫으로 마셔도 아이스로 마셔도 맛있는 커피.
바다를 연상시키는, 투명한 맛이 진하게 퍼져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 우연히 ‘판매 중’이라고 써붙인 원두 리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가타카나는 영 까막눈이라 신기해 보이는 상품 설명을 찍어 번역기로 돌렸더니 되려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문장이 나와버렸다. 대체 저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 뜨거운 커피로도 아이스커피로도 좋은 데다 투명한데 진하단다. 이렇게 대비되는 단어들을 사용한 테이스트 노트는 또 처음이다. 이건 뭐 거의 만능열쇠 수준의,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적 표현이 아닌가. 한자와 히라가나로 쓰인 ‘해변에서’라는 단어 정도는 읽을 줄 알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애초에 몰랐다면 모를까, 궁금하다 못해 고통스러워졌다. 바다를 연상시키는 맛이라니. 문득 방콕에서 마셨던 ‘소금 향’의 드립 커피가 생각났다.
아무래도 싱글 블렌드는 아닌 것 같아 주인으로 보이는 분께 여쭈어 보니 브라질, 르완다, 에티오피아 원두를 섞어 블렌딩 한 원두란다. 최소한 소금 맛의 테이스트 노트로 바다를 표현했을 것 같지는 않고 대충 무슨 맛인지도 알 것 같았지만 여전히 저 원두가 궁금했다. 메뉴판에 당당히 적힌 설명 때문에 라도 속는 셈 치고 지갑을 열려다, 찬장에 가득 쌓인 원두들이 생각나 눈을 질끈 감았다. 더더군다나 커피로 유명한 곳에 여행을 온 것도 아니라 여행 전부터 절대로 원두는 사 오지 않겠다 다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맛이 궁금한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8월까지만 한정으로 파는 ‘해변에서’ 원두를 사면 커피 봉투 한가운데 그려진 카페 로고 고양이 머리 위에 작은 해군 모자 스티커를 붙여서 준다고 했단 말이다. 생각해보면 저렇게 귀엽고 치명적인 고양이 로고나 사모으려고 돈을 버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쩔 수 없이 지갑을 열었다. 찬장에 쌓인 원두야 어떻게든 다 먹겠지.
혼자서만 가고 싶어 하던 일본 소도시를 마음속 어딘가에 품고 살다가, 혼자가 되어 버린 김에 즉흥적으로 떠나버렸다. 보통은 유명한 카페나 맛집 정도는 꿰고 여행을 떠나는 편인데 이번에는 거의 무계획에 가까울 만큼 찾아보지 않고 떠났다. 그러다 우연히 들른 ‘라이프 스타일 숍’에 입점되어 있는 커피 원두를 보았고, 좀 외곽이지만 숙소에서 멀지 않길래 다음 날 무작정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커피 봉투 로고가 고양이인지 시바견인지 헷갈리고 궁금했던 이유가 더 크다. 아이스커피 세트를 주문하고 나서 짧은 일본어로 물어보니 고양이가 맞고 인테리어 컨셉도 고양이래서 ‘나도 고양이를 정말 정말 사랑한다’고 맞장구쳤다. ‘나도!’라고 웃으며 엄지를 드는 직원에게 역시 엄지를 들며 기분 좋은 유대감을 표했다.) 여행 중에 마셨던 커피 중에 제일 좋았고, 작은 카페였지만 분위기도 맘에 들었으며 로고마저 고양이니. ‘해변에서’라는 이름을 가진 원두라도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든 마성의 카페였다.
보통 카페에서 구매할 수 있는 원두는 ‘블렌딩 원두’와 ‘싱글 블렌딩 원두’로 나누어볼 수 있다. 먼저 ‘블렌딩 원두’는 두 가지 품종 이상의 원두를 적당한 비율로 섞어 만드는 방식을 말한다. 보통 그 카페 이름을 딴 시그니쳐 블렌드이거나 ‘국가 명’으로 시작하지 않는 이름일 때 블렌드 방식일 가능성이 크다. 밸런스가 좋은 브라질 원두에 두세 가지 정도의 품종을 더해 특색을 가하는 경우가 많고. 싱글 블렌딩 원두는 말 그대로 하나의 품종만으로 구성된 원두를 말한다. 오롯이 그 품종만의 특색을 느껴보고 싶다면 싱글 블렌딩 원두가 답이다. 블렌딩 원두는 섞인 품종 간의 조화가 중요하기도 하고 맛의 베이스로 밸런스 좋은 품종을 사용하는 편이기 때문에 바디감이 좋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일까. 여행 중이던 날씨도 초여름에 쨍했고 8월 말까지 한정 판매라고 하여 영화 ‘콜미 바이 유어 네임’ 같은 맛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성적으로는 영화 ‘이터널 선샤인’ 쪽의 내음이 느껴질 것만 같았다.
여행에서 돌아와, 사온 원두를 몇 번에 걸쳐 내려 마셔 보았다. 예상대로 바디감이 좋길래 ‘칼리타’, ‘멜리타’, ‘고노’, 다시 ‘칼리타 아이스 드립’ 순으로 마셨다. 좋았다. 정확히 바다의 느낌이 난다기보다는 한낮의 모래사장에 앉아 선글라스를 낀 채 아이스로 마시거나, 약간은 선선하고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가 저물어 가는 모양새를 관조하기에 좋을 맛이었다. 사실 이름에서부터 표현 방식을 바다나 해변으로 제한해두다 보니 그런 느낌이 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명확한 테이스트 노트의 커피보다 상상력과 공감을 요구하는 커피는 재미있으니까. 맛 자체도 너무 강렬하거나 쓸쓸한 쪽이 아니라 좋기도 했고. 선물로 받아 아껴두던 쿠키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달달한 내음의 파도 소리가 입가를 스친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잔 분량의 원두는 어떻게 내려볼까. 커피와 함께 하는 하루는 이래서 재밌다.
- 집에서 내린, 일본 다카마쓰 pushipushi coffee, ‘해변에서’ 원두. 칼리타 아이스 드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