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마신 커피는 내일과 같지만 다르다.
서예에서는 한 획, 한 점마다 쓰는 사람의 성정과 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같은 사람의 솜씨라도 그릇에 담기는 그 날의 마음에 따라 또 달라진단다. 원체 악필이라 서예에서 추구하는 바대로 해석하자면 마음이 못생겼단 말이 될까 마음에 걸리지만,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손 때가 탄 물건이나 행동, 습관 등에는 그 사람이 담기기 마련이니까. 글씨만 하더라도 어찌 필체만이 그 사람과 닮는다고 할 수 있을까. 문장의 맛에도, 닿는 손길 손길과 마침표 하나까지도. 본인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렇기에 매사에 돌아보고 반성하며, 거울이 깨져 스스로를 해치는 칼이 되지 않도록 살펴야 한다.
커피, 그중에서도 사람 손을 많이 타는 핸드드립 방식에서도 내리는 사람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도구의 선택이라던가 드립 기술과는 약간 별개의 영역으로. 일반적인 정의부터 설명하자면, 핸드드립은 ‘드리퍼’라고 불리는 커피 도구에 종이 필터를 받친 뒤, 분쇄한 원두를 넣고 뜨거운 물에 우려내는 방식을 말한다. 내리는 사람의 주관적 방식을 제외하더라도, 핸드드립에는 기본적으로 커피 맛을 좌우할 수 있는 요소가 많다. 원두나 드리퍼 종류, 물 온도 등이 대표적인 예인데, 여기서 원두만 하더라도 품종부터 수확 방식, 로스팅 방법과 정도, 일자, 분쇄도 등등 무수한 가지로 세분화시킬 수 있다.
커피의 맛은 보통 ‘아로마(향기)’, ‘플레이버(향미)’, ‘애프터 테이스트(뒷맛)’ 세 가지 요소로 표현한다. ‘아로마’는 커피를 마시기 전 커피에서 풍기는 향 자체를 의미하며 ‘플레이버’는 커피를 입에 머금었을 때 혀에서 느껴지는 맛으로 정의한다. 마지막 ‘애프터 테이스트’는 커피를 넘기고 난 뒤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잔향을 뜻한다. 커피를 마시기 전 향을 맡아보고 한 모금 넘기며 천천히 음미하는, 일련의 과정을 떠올려 본다면 각각의 포인트를 가늠해볼 수 있다. 이러한 커피의 맛은 복잡 미묘하고 매우 주관적일 수 있기에 보통 ‘테이스트 노트’라는 방식으로 맛의 근원이 되는 원두 별 특징을 표기한다. ‘산미가 좋고 꽃향기가 나는’처럼 간략히 표현할 수도 있고 ‘복숭아’, ‘아몬드’와 같은 방식으로 좀 더 객관적이고 상세한 방식으로 전달할 수도 있다. 테이스트 노트 자체도 마시는 사람의 주관에 따른 감각적 표현이므로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거나 전혀 다른 테이스트 노트로 표현할 수도 있다. 다만,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도록 작성되는 편이니 원하는 맛을 찾기 위한 길잡이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커피의 ‘맛’은 답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볼 수 있다. 기본적인 커피 맛의 근원을 추구하고 감각을 공유할 수는 있되, 본인이 느끼는 커피를 오롯이 남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몇 년 전, 핸드 드립 방식 위주로 서너 개월 커피를 배웠다. 소규모의 실습 위주라 다른 수강생들과 최대한 동일한 조건에서 커피를 내리고 시음해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해당 방식을 통해 선생님께서도 우리에게 많이 일깨워주려 하셨고, 스스로도 많이 자각했던 부분은 ‘사람마다 내리는 커피의 맛이 제각각이다’는 점이었다. 물론 실력 차이도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원두가 가지는 특성을 풀어내는 과정에서 각자의 맛이 갈렸다. 분명 동일한 온도의 물에 똑같은 도구를 사용하고, 한 날 한시에 로스팅한 원두를 같은 굵기의 정량으로 갈아 넣었다. 그런데도 결과물은 커피 맛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달랐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맛이었다. 커피의 '다른' 맛을 살리는 방법은 지극히 상대적인데, 예를 들어 커피를 진하게 내린다면 초콜릿, 아몬드와 같은 바디감 있는 테이스트 노트는 살리기 쉽더라도 과일이나 꽃과 같은 산미 있는 테이스트 노트 표현에는 어려움을 겪는다. 동일한 조건에서 내렸음에도 각자가 내린 커피에서는 이런 류의 다름을 가졌다.
내 삶의 속도는 느린 편이다. 어렸을 때는 성격이 급하다는 소리를 곧잘 들었고, 지금 생각하기로도 급한 축에 속한다고 생각하는데 남들 보기에는 그렇질 않은 모양이었다. 말이나 행동이 느린 편이고, 전체적으로 가라앉아 있거나 차분한 편이란 소리를 많이 듣는다. 가끔씩 뒷짐을 지고 걷다 회사 동료들에게 걸리면 나이를 속이고 들어온 것이 아니냐며 우스갯소리를 들을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보기보다 성격은 급한 편’이라고 반박하곤 하는데, 커피 수업 때 내린 커피를 마시면서부터 어릴 때와는 달라진 삶의 속도를 인정하기로 했다. 내릴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내 손을 탄 커피는 진했다. 남들보다 내려지는 속도도 느린 편이었고. 의식하며 방식에 엄청난 변화를 주지 않는 한 진한 맛이고 의식하더라도 어딘가가 무거운, 일관적인 영역 내에서 표현되었다.
나의 커피는 느리고 진하다. 향은 부족하고 무거우며, 자칫 잡미를 포함시키기 쉽지만.
깔끔하게 떨어지는 맛을 지녔다.
얼마 전, 동네 근처에 개업한 카페에서 시험 삼아 한 잔 주문했다가 맛이 꽉 찬 드립 커피를 만났다. 테이스트 노트로 쓴다면 칸을 빼곡하게 채울 수 있을 만큼의 ‘플레이버’과 ‘애프터 테이스트’를 느꼈다. 약간의 부러움, 그보단 옅은 질투심이 함께 피어올랐다. 나는 왜 이 사람의 커피처럼 풍부한 맛을 내지 못할까.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맛을 음미하다 문득 카페 주인의 삶이 궁금해졌다.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있기에.
이런 맛의 커피를 내리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