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처럼 쏟아지는 커피.

커피를 만나는 방법.

by Monochrome blues
‘당신의 삶은 계획적인가요, 즉흥적인가요?’


여기서의 ‘삶’이 새로 산 물건의 설명서를 읽냐 마냐의 문제라면, 계획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다. 설명서는 포장지인 양 펴보지 않고 전원 버튼부터 찾는다. ‘어떻게든 하면 되겠지’란 마음이고, 실제로도 어떻게든 하면 또 되니까. 굳이 따지자면 ‘어질러진 책상’ 쪽이 편한 사람이다. 허나 ‘삶’이 여행이라면 계획적인 부류에 속한다. 일단 계획을 세울 수 있는데까지 세우고, 웬만하면 짜여진 내에서 행동한다. 나에게 있어 여행 계획이란 촘촘히 짜인 거미줄과 같다. 처음과 다른 여정을 선택하더라도. 이 역시 생각해두었던 일부에 속하니 넓게 보면 모든 것이 계획대로다.


내 여행의 7할은 먹는 것이요, 그중 절반은 커피 차지다. 먹는 게 남는 거란 주의라서. 일단 여행지가 정해지고 나면 지도에는 가야 할 맛집과 카페가 별처럼 쌓인다. 어딜 가더라도 먹어야 할 음식과 맛있는 커피가 너무 많기 때문에. 세상에 모든 음식과 커피를 마실 순 없겠지만 최대한 많이 먹고 마신 후에 죽을 작정이다. 사실 여행 계획에 세심해지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세상에는 맛있는 것보다 맛없는 것이 더 많으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한정된 여행 일정에서 최고의 효율을 추구하려면 사전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취합해야 한다. 의식하고 리스트업 하진 않지만 보통 여행 중에 갈 수 있는 수의 4 배수 내지 5 배수 정도의 곳을 지도에 표시한다. 그중에 고르고 골라 실제 여행길에 나선다.


50010026.JPG 필름으로 담은, 여행길에서 만나는 맛집과 거리, 사람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커피를 먼저 마셨고 우리만큼이나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지역마다 관광 명소 같은 카페들이 있다. 도쿄의 블루보틀 체인이나 마메야 커피, 교토의 아라비카 커피(브랜드 로고때문에 % 커피, 혹은 응커피 라고도 부른다), 오사카의 모토 커피나 브루클린 로스팅 컴퍼니 같은 곳처럼. 보통 이런 곳의 커피에서는 ‘당연함’을 확인한다.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부터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너무 많다. 이미 수많은 커피 선배들의 발자취가 정보의 바다에 넘쳐난다. 사용하는 커피 원두 계열이나 테이스트 노트는 물론, 정경이나 분위기까지도. 여행 계획을 세우다 보면 이미 그곳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당연한’ 커피는 분석적으로 마시게 된다. 실제로 마주한 카페 건물 정경이나 간판에 정겨워하며 단골손님처럼 들어선다. 대부분 미리 작정하고 간 메뉴를 주문하고, 그동안 생각해왔던 분위기나 느낌에 견주어 본다. 리뷰를 통해 세워진 기준을 토대로 커피 맛을 표현한다. ‘역시 산미가 좋네’ 라던가 ‘바디감이 좋은 원두에 우유가 진하니 다른 사람들 얘기처럼 라떼 맛이 균형 잡히고 풍부하군’처럼. 미리 찾아본 기대에 주관을 섞어 경험을 적는다.


50070011.JPG 기대하던 실제를 마주한 순간들.

여행에서 만나는 커피의 대부분은 십중팔구 이런 식이다. 반대의 드문 경우는 보통 플랜 C, 플랜 D까지도 여의치 않거나 당시의 매우 즉흥적인 기분에 의해 만들어진다. 날이 너무 덥다던가 추워서, 혹은 쉬고 싶어서. 계획을 세우며 생긴 기댓값에 비해 현실이 미치지 못해서. 언젠가의 오사카 ‘나카자키초 카페 거리’에서 마신 커피가 그랬다. 동네 분위기 자체는 너무 좋았는데 미리 찾아 놓은 카페들이 마뜩잖았다. 카페 자체는 나쁘지 않아 보였는데, 그냥 성에 차질 않았다. 여기서 한 잔 하고 넘어가기엔 아쉬웠다. 그냥 커피는 포기하고 지하철 역으로 향하다 가정집 같은 낡은 외관 한편에 놓인 나무 간판이 눈에 밟혔다. 간판이 있음에도 마치 을지로 상가 건물 3, 4층에 위치한 간판 없는 카페들처럼, 사람을 긴가민가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는 카페. 구글 지도로 내 위치를 검색하니 카페는 맞는 것 같다. 차라리 여기가 이 곳 분위기에 걸맞는 카페인 것 같아 큰 마음먹고 문고리를 잡았다.


50070023.JPG 카페같지 않은 카페 입구.

시멘트와 빈티지 나무 가구의 적절한 조화. 적당히 어두운 조명. 안경이 어울리는 정갈한 차림의 주인아저씨. 가스버너에서 김을 뿜으며 끓고 있는 주전자. 테이블 간의 넓은 간격과 잔잔한 분위기. 심지어 BGM은 쳇 베이커에 커피는 드립 방식이었다. 이렇듯 우연히 마주하게 된 즉흥적인 카페는 감상적이다. 어떠한 판단 지표도, 정보도 없다. 원두 산지를 통해 적당히 더듬어볼 뿐이다. 미지의 커피를 받아 들고 느끼는 첫 향, 첫 모금, 첫 번째 목 넘김은 설레고 두근거린다. 그곳의 커피는 주인아저씨와 카페 분위기를 닮아 있었다. 적당히 묵직하면서 잔잔한 산미. 빈티지 잔과도 어울리는 향과 분위기의 커피. 우연히 들른 곳이 너무 성공적이라 당황스럽지만 이번 여행의 선물로 받아들였다.


50070018.JPG 필름 사진이 더 어울리는 곳.
50070025.JPG


50070019.JPG
50070021.JPG
50070022.JPG
커피만큼이나 좋았던 공간, 사람들.
‘당신의 커피는 계획적인가요, 즉흥적인가요?’


주머니 속 지도에는 가야 할 카페 목록이 쌓여 있지만. 커피는 당연스럽지만 감상적인 구석도 있다. 커피 한 잔에는 그 날의 시간과 공간이 쌓여 별처럼 빛난다. 중력처럼 끌어당기는 커피에도, 은하수처럼 빛나는 커피와 혜성처럼 쏟아지는 커피에도.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담긴다. 계획이나 즉흥 같은 것들은 방식에 불과하다. 나의 커피는 계획적이지도, 즉흥적이지도 않다. 나에게 있어 커피는 지금 이 순간, 바로 그때이다. 만나는 방식과 감정이 순간에 만나, 그곳에 커피와 함께 있었을 뿐이다. 커피는 그냥 커피여서 좋다. 계획적인 커피는 당연스러워서. 즉흥적인 커피는 감상적이어서. 그래서 좋다.


- 동네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에서, 페루 아마조나스 왐보. 푸어 오버 방식으로.




매거진의 이전글커피 한 잔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