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의 힘.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by Monochrome blues

오랜만에 수첩으로 적고 있는 글. 그 바로 전 장은 온갖 분노와 증오, 우울의 집약체였다. 간만에 타게 된 밤 비행기가 두 시간 가까이 연착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휘몰아치는 우울감과 분노를 어떻게 할 길이 없어 가방 속 수첩을 꺼내 배출하였다. 글보다는 악다구니에 가까운 감정들의 나열을. 다시 보면 어딘가에 써먹을 일 없는 쭉정이 글임을 알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분노로 머리가 터져버리거나 우울의 늪에 빠져버릴 것만 같았다. 사실 단순한 비행기 연착만이 이 감정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다. 회사 업무 등의 복합적인 일들이 그동안의 정신을 좀먹었었다. 잘 익은 봉선화 같은 멘탈이, 건들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던 상태에 불을 지폈을 뿐이었다.


비행기는 결국 새벽 3시가 다 되어서야 도쿄에 도착했고, 방음이 열악했던 캡슐 호텔에서는 끝없는 중국인들의 하이톤 대화 속에서 선 잠을 청해야 했다. 그럼에도 아침부터 꾸역꾸역 홀로 길을 나선 이유는 조금만 더 쳐졌다가는 정말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행 전부터 홀로 떠날 여행길의 첫 끼로 ‘심야식당 나폴리탄 스파게티’를 추천했던 여자 친구의 기대에 부합하고자 기치조지 행 지하철에 몸을 맡겼다. 가게 오픈보다 빨리 도착한 관계로 동네 골목 정경이라도 몇 장 찍어볼까 기웃거리다 흥이 오르질 않아 포기했다. 현재 위치에서 가깝고 괜찮아 보이는 카페를 구글 지도에서 찾았다. 걸어서 3분 정도 거리에 별점도 리뷰도 괜찮다. 고민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Ryu Mont coffee stand'


DSCF7652.JPG 협소 주택같은 카페가 동네 골목 중간에 숨어 있었다.

협소 주택처럼 생긴 카페의 모양새가 후쿠오카 ‘Stereo coffee’가 연상되었다. 카페치고 흔치 않은 미닫이 방식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바리스타 한 분과 커피 바, 작은 테이블 2개가 반겼다. 동네 마실 나온 느낌이지만 어딘가 세련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께서 이미 한 자리를 차지하고 계셨고. 1, 2층으로 구분된 카페의 1층은 매우 협소했지만 어차피 홀로 한 걸음이라 문 앞에 남은 자리에 앉았다. 짧은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 아이스커피 한 잔을 쫓기듯 주문하고 숨을 돌리자 무언가 마음이 놓였다. 귀가 열리고 냄새를 맡을 정신이 돌아왔다. 그라인더에 원두 가는 소리 중간 즈음 스민 모던 재즈풍 음악과 신선한 원두 향미를 맡아본다. 그제야 시야가 조금씩 트인다. 주인이 정성스레 꾸며놓은 가게 안과 문밖 동네 분위기가 보인다. 방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DSCF7632.JPG 카페 밖을 조용히 바라보며.

바리스타에게 정중히 사진 허락을 받고,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몇 장 남긴 뒤 카메라를 바로 내려놓았다. 지금의 시간을 잃고 싶지 않아 조용히 문밖과 음악 소리를 응시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수첩을 꺼내 첫 문장을 끄적이기 시작했다. 리뷰에 누군가 남겼던 문장대로 바리스타의 손은 느렸지만 정성되어 보였고, 이미 카페에 홀린 마음에서는 이대로 커피가 쭉 나오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생각에 분위기를 즐겼다. 이윽고 주문했던 아이스커피가 나왔다. 곁들여 마시면 좋을 거라고 작은 병에 권한 커피 크림과 메이플 시럽도 함께. 아이스커피임에도 새어 나오는 산미가 마시기도 전에 향으로 느껴졌다. 첫 한 모금에 모든 것이 완전해졌고.


아, 이래서 커피지. 전 날에 휘갈긴 문장들은 무색해지고 완벽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커피라면 종류 무관, 국적 불문이지만. 생존을 위한 커피와 마음에 적시는 커피는 그 결이 다르다. 내가 서있는 장소와 오감에 스미는 분위기, 그리고 커피 한 잔 그 자체가 ‘커피’의 범주이자 힘이다. 보통은 단 커피를 좋아하지 않아 무언가 곁들여 마시는 경우도 드물고, 지금 마시는 커피 자체로 마음에 들었지만 작은 일탈을 해보고 싶었다. 커피 크림의 고소함과 메이플 시럽의 당도, 마지막 커피의 묵직함에 눈이 트였다. 따갑기만 하던 햇살이 이렇게나 아름다워 보일 수가.

IMG_7875.jpg 맛있는 커피 만세!


이대로 카페를 나서는 것은 용납할 수 없어 원두 100g을 집어 들었다. 짧은 언어로 커피 맛에 대한 찬사와 원두 값을 지불하고 나오자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아, 이게 커피지.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 몰라도. 커피가 내 곁에 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커피 한 잔의 힘으로 오늘도 이렇게 삶의 위로를 받는다.


- 도쿄 기치조지 'Ryu Mont coffee stand' 아이스 커피와 함께.

-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Cigarettes After Sex'의 Sunsetz를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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