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능력주의의 덫
'대신 그것은 성공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바꾸고, '정상에 오르는 사람은 스스로 잘나서 그런 것'이라는 능력주의적 오만에 의문을 제기함을 뜻한다. 그리고 능력이라는 말로 옹호되어 온, 그러나 분노를 퍼뜨리고 정치에 해를 끼치며 사회를 갈라놓는 부와 명망의 불평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러한 생각 바꾸기는 능력주의적 성공 개념의 핵심인 두 가지 인생 영역, 즉 교육과 일에 대한 집중을 필요로 한다.' 마이클 샌델
시사인과 동네 책방 (좋은 날의 책방)이 함께 진행하는 읽는 당신 북클럽에서 처음 함께 읽게 된 책은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이었다. The Tyranny of Merit, 능력주의의 폭정 정도로 해석될 수 있는 책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능력주의가 만들어낸 공정이라는 신화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그 신화 속의 기회는 결코 모두에게 공정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일곱 개의 챕터로 나뉘어 있는 책을 통해 샌델은 능력주의의 허상을 파헤치려 애쓴다. 우리가 쉬이 이입할 수 있는 대학 입시와 능력주의로 시작되는 책은 그 이후 기술 관료의 등장과 소외되는 이들의 포퓰리즘, 능력주의 도덕의 역사, 학력주의 이면의 능력주의, 그리고 일의 존엄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맥락을 통해 현시대의 능력주의를 진단해낸다. 기실 정의란 무엇인가만큼이나 읽기 힘든 책이었기에, 책에 대한 감상평만큼은 가볍게 느낀 바들을 쓰려고 한다. 어려운 책을 쉬이 접근하는 방법은 역시 개인의 서사에 이야기를 녹여내는 것뿐이 아닐까 싶었다.
책을 펼치며 문득 능력주의의 모순에 관한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이야기는 출발선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얼마 전 작고한 스웨덴의 통계학자 한스 로슬링이 언급했듯 전 세계에서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인구는 약 10%라고 한다. 여전히 인류의 10%는 문맹이고, 15%는 전기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7억 명의 인류가 하루 2달러 이하로 살아가고, 그들은 팬더믹 시대에 가장 취약한 계층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스 로슬링은 책 팩트풀니스를 통해 선진국과 개발 도상국 즉,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로 나누는 이분법적 견해를 반대한다. 하지만 그가 언급했듯 여전히 절반 이상의 국가가 '중산층' 국가이고, 이들은 인류의 기본적 욕구만을 성취했을 뿐 여전히 상대적 빈곤에 시달린다. 과연 그들과 우리, 그리고 흔히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서유럽의 젊은이들이 같은 출발 선상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유색인종 혐오가 지배하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출발 선상에 서 있는 걸까.
독일에서 공부할 때 정말 다양한 출발선에서 시작한 친구들을 만났다. 슬럼의 한복판에서 자라와 겨우 홀로 선 중동 친구, 폭락하는 화폐 가치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자신의 미래를 처분했던 남미 친구, 부모님 한 달 월급보다 많은 독일 대학의 장학금에 놀랐다며 회한의 미소를 지었던 동남아시아의 친구와, 여전히 자국의 신분제도에 종속되어 차별을 무릅쓰고 공부를 했던 남아시아의 친구. 그들보다 나는 훨씬 앞선 출발선에 있었고, 나보다도 미국과 서유럽의 친구들은 짐작 못 할 정도로 앞서 있었다. 유색인종과 여성과 제삼 세계와 성 소수자, 그리고 제일 세계의 경제적으로 풍족한 백인은 결코 같은 출발 설 수 없었고, 이 지점에서 능력주의는 이미 공정성을 잃고 있었다.
공정성을 잃어버린 능력주의는 불편한 잣대를 만들어냈다. 샌델은 2장 "선량하니까 위대하다" 능력주의 도덕의 짧은 역사"에서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직업윤리를 들고 오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능력주의가 한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마저 이념을 잣대로 평가를 내리는 상황을 직시하게 된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북미와 남미의 경제적 성장과 상황을 설명하는 다양한 경제 사회적 이론들이 있는데, 흔히 남미의 저성장을 설명하는 핵심 이론 중 하나가 종속 주의이다. 종속 주의 외에도 그 차이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두 대륙의 종교적 차이에 방점을 두는 접근이 있는데, 이를 통해 북미는 부지런한 개신교로 남미는 게으른 가톨릭으로 낙인찍힌다. 능력주의 앞에서 북미는 도덕적으로 신실하고 성공한 집단이 되고, 남미는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나태한 민중이 되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직업윤리에 따른 차별은 이렇게 또 다른 모습으로 능력주의의 횡포를 드러낸다.
이처럼 능력주의의 발현은 사회적 낙인찍기로 이어진다. 모든 것은 본인의 노력과 능력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므로, 가난한 사람과 가난한 사회가 불평할 것은 사실 본인의 노력 부족일 뿐이다. 능력에 대한 숭배는 더 치열한 경쟁을 만들어내고, 1%가 되지 못한 99%는 패배자로서 남는다. 전체의 1%만이 행복해지고 나머지 99%가 불행해지는 사회,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의 자화상이 아닐까 싶다. 그럼 마이클 샌델이 그의 저작 공정하다는 착각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공정하다는 게 착각이고, 우리가 숭배하는 공정한 능력주의가 사실은 폭정을 일삼는 그릇된 주의라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아쉽게도 샌델은 문제를 직시할 뿐 처방을 내리지는 않는다. 현대 포퓰리즘의 등장이 능력주의에 의해 소외된 이들에 의한 저항임을 드러내면서도, 그 포퓰리즘을 없애기 위해 기술 관료적 사회를 개혁할 방안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부의 양극화가 이루어낸 사회적 불평등을 가리키면서도, 그 양극화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애써 무시하고 지나간다. 출발선이 다른 식민 피지배국들의 현재와, 여성, 유색인종, 성 소수자의 이야기는 커다란 담론에 함몰되고, 그 가운데 철학적 물음만 가득하다. 그는 일의 존엄성에 관해 언급하면서 일의 존엄성을 되살려야만 사회가 불평등과 능력주의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가치를 재현해내며 겸손해지자는 그의 마지막 발언은 사실 어딘지 모르게 제 1세계의 백인 중년 남성의 체면치레의 외침으로 들린다. 사실 우리가 들어야 하는 목소리는 기울어진 운동장의 출발선에 선 이들, 능력주의의 폭정에 주저앉은 이들이 아닐까 싶었다.
능력주의는 공정하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읽는 당신 프로젝트의 두 번째 책인 가난의 문법과 세 번째 책인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에서 그 대답을 조금이라도 찾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