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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규 May 23. 2021

그녀는 벌써 스물두 해를 프라하에서 보낸 참이었다

Prague, the Czech Republic

그녀는 벌써 스물두 해를 프라하에서 보낸 참이었다. 앳된 표정으로 복숭아뼈 언저리까지 올라오는 하얀 양말을 바로잡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얼굴 가득 비산하는 먼지처럼 주근깨가 펼쳐져 있었다. 나는 프라하가 싫어. 이 도시는 오래된 왕의 대관식 이후 변함이 없었고, 앞으로도 변치 않을 거야. 눅눅한 먼지처럼 색이 바랜 도시에서 벗어나고 싶어. 나의 반짝이는 젊음처럼 살아있는 도시에 갈 수 있다면, 그곳에서 새하얀 리넨 셔츠를 입고 밝은 도시를 활보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거 같은데.


왕의 대관식은 바츨라프 광장에서 시작되었다. 많은 관광객의 여정이 시작되는 쇼핑의 성지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도시에 대한 설렘을 안거나, 지친 발을 내려놓는 여행의 시작점이었다. 왕은 좁은 골목을 따라 구시가지 광장으로 향했다. 주변에 늘어선 다국적 브랜드의 환호를 뒤로한 채 행렬은 천문 시계에 다다랐다. 천문 시계 앞에는 스타벅스가 있어, 프라하의 중요한 지점들에는 어김없이 자리 잡고 있지. 거기서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숨겨진 카페와 바가 가득한데, 관광객들은 왜 정면의 초록색 로고만 쫓는지 몰라. 그녀는 그렇게 골목 어귀의 스카우트스키 인스티튜트로 향했다. 이른 아침의 치즈 토스트를 먹으며 바라보는 관광객의 무리는 덧없는 한 무리의 초식동물들 같았다.


왕은 광장을 지나 카를교로 향해. 1300년대에 지어졌다는 다리는 새벽 여섯 시가 아니고서야 매번 복작일 뿐이야. 왕의 행차를 따라잡는 건 어렵지 않아. 그 안내 역할을 이제는 중국과 한국 가이드들이 행하고 있는걸. 그들이 높게 치켜든 우산이나 깃발을 따라가다 보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머금은 다리가 나왔다. 블타바, 스메타나가 나의 조국을 부르짖었던 그 강이었다. 강은 백조 떼에 점령당한 채 고고히 물살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낮의 관광객들은 강을 떠다니는 백조와 강변에 반사되는 고즈넉한 도시 풍경에 시선을 주었고, 밤이면 강은 언덕 위의 프라하성을 머금었다. 성 단지의 벽면을 따라 솟아오른 빛줄기는 성을 황금색으로 물들였고, 그 빛 아래서야 성은 찬란함을 선보였다.


사실 성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초여름날의 늦은 아홉 시 경이야. 개와 늑대의 시간, 명멸하는 빛이 프라하성 너머로 자취를 감추고 하늘이 파랗게 물드는 순간을 그녀는 사랑했다. 새까만 어둠이 도시를 감싸 안기 직전, 황금빛 성과 어두운 파랑이 여름날의 재즈를 추는 순간, 늑대가 된 개는 당신에게 정중히 춤을 권할 터였다. 늦은 아홉 시의 성은 한적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맥주를 마시러 도시의 낮은 구역들로 향했고, 성을 품은 블타바강은 너른 강변을 취기 어린 미소들에 내줬다. 그렇게 성이 적막에 둘러싸이면 우리는 부러 길을 나섰다. 프라하성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왕은 성에 올라 도시를 굽어봤을까. 그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 핏줄로 혹은 이름으로 이어진 왕좌를 그는 어떤 생각으로 간직했을까. 프라하성에 올라야 도시가 보였다. 도시를 감싼 듯 흐르는 강줄기를 따라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건물 하나에 나와 당신의 삶이, 또 다른 건물 하나에 누군가의 삶이 자리 잡고 있을 터였다. 왕의 길을 따라 성에 올라 도시를 바라봤다. 나의 이 년의 기억들이 강과 골목과 첨탑에, 그 풍경에 부딪혀 부서지는 빛들에 깃들어 있었다.


친구들은 정원에 올 때면 내게 연락을 했어. 너의 여름 정원에 왔어, 하고 오는 문자들에 나는 봄이 도시에 왔구나 싶었지. 대관식을 끝낸 왕은 이 정원으로 향했을까. 휘황찬란한 성을 떠나 성곽의 조그만 정원을 거닐며 사색에 잠겼을까. 프라하성에는 소소한 정원들이 있었는데, 봄과 여름, 가을에만 그 모습을 관광객들에게 드러내곤 했다. 겨우내 외로움을 삭혔던 정원은 만발한 꽃들로 바쁜 관광객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하지만 성의 위용에 감탄한 관광객들은 쉬이 정원을 지나치곤 했다. 나는 사실 이 정원들을 제일 사랑해. 바쁜 여름에도 한적하게 앉아 나뭇잎들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빛을 볼 수 있는 곳, 그 출렁이는 빛의 물결을 책에 담아 읽고 있노라면, 프라하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지.


나는 종종 어느 날의 여름들에 안나 왕비의 여름 궁전 앞 정원에 홀로 앉아 밀란 쿤데라의 책을 읽곤 했다. 삶이 한 편의 농담이라던 그의 말마따나, 나의 정원은 한 편의 농담이 된 지 오래였다. 이러니, 프라하를 사랑할 수밖에 없지.



뒷모습, 내가 만났던 도시와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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