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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규 Oct 20. 2020

내가 프라하를 가장 사랑했던 이유는 사람이었다

Prague, the Czech Republic

프라하는 혼종의 도시야, 라고 그가 말했을 때 나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떠올렸다. 그 인간은 프랑스인이나 다름없다고, 라고 그에게 핀잔을 받았지만 역시 내게 프라하는 쥘리에트 비노슈가 분한 프라하의 봄으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동유럽 세계화 전진 기지 프라하는 문화와 역사가 한데 섞여, 수많은 국적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오랜 역사의 풍경에 몸을 누이거나, 새로이 생긴 카페에서 힙스터 문화를 만끽하고는 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플랫에는 총 여섯 국가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슬로바키아인, 미국인, 콜롬비아인 (과 그의 여자친구 체코인), 프랑스인, 그리고 나. 기실 내가 프라하를 가장 사랑했던 이유는 사람이었다.


프라하에 살면서 참 많이도 옮겨 다니며 살았다. 처음 몇 박은 공항 근처, 프라하 서쪽의 6구에서 살았는데, 버스와 트램을 환승해, 한 시간이 걸려서야 구시가에 닿을 수 있었다. 집을 나설 때면 매번 낑낑대며 슬퍼하는 요크셔테리어 아리가 있던 소박한 이층집은, 나에게 가장 처음의 프라하로 남아있다. 한국인 엠제이가 살았던 그 집은 유일하게 한국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던 곳이었다. 그다음 한 달간 묵었던 곳은 남쪽 프라하 4의 한적한 교외였다. 나는 사진 스튜디오와 에어비앤비를 동시에 하는 러시아 친구 엘리슈카네서 한동안 묵었다. 그녀는 한 개의 방을 작업실과 침실로 동시에 사용하며, 나머지 네 개의 방을 에어비앤비에 내놓았는데, 나는 그중 가장 넓은 옥탑에 묵으며 한 달을 보냈다. 매번 바뀌는 구성원들과의 일상은 하루하루가 축제였고, 같이 사진을 찍던 엘리슈카와의 일상 또한 즐거웠다. 그러던 한 번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지인이 불쑥 찾아와 묵게 되었다. 부엌에서 그를 만났을 때의 탄성과 환희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세 번째로 살았던 곳은 다시 서쪽, 프라하 6구의 드리노폴이었다. 터키계 친구 도구는 자신이 세를 주고 사는 집을 에어비앤비에 내놓고 있었다. 매일의 출퇴근에 시간이 어긋나 그를 볼 날은 많지 않았지만, 가끔 그와 마주할 때면 우리는 이민자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는 했다. 어느 날 그는 불현듯 말했다. 프라하는 절대 국제적이지 않아. 이곳은 정체된 역사의 도시이고 그 역사 속에 관광업만이 유일하게 외국인들을 불러와. 내가 살았던 브뤼셀과 비교하면, 이곳은 그저 관광객과 현지인이 공존하는 도시일 뿐이야. 한 해 방문객 이 천 만 명, 인구 백만의 도시 프라하는 분명 관광지였지만 국제적인 도시는 아니었다. 이곳을 살아가는 이민자들은 결코 사회에 동화될 수 없었고, 그저 변두리에서 자신의 삶을 일구어 살아갈 뿐이었다. 


네 번째 집은 시내 한복판에 있었다. 플로라 Flora, 프라하의 모든 버스가 오가는 곳 바로 앞에 자리 잡은 집에서 나는 처음으로 플랫 친구들을 사귀었다. 프랑스인, 독일인, 미국인, 한국인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플랫은, 종종 친구들로 가득 찼고, 우리는 자주 길거리를 행진했다. 학생과 노마드, 영어 선생과 사진작가, 각각의 직업은 달랐지만 우리는 꽤 잘 지냈다. 다섯 번째 집은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콜롬비아 친구 루이스가 사는 곳이었다. 처음 오래된 플랫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높은 천장과 넓은 방, 발코니 너머로 보이는 프라하의 가을 풍경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나는 바로 짐을 풀고 내 생애 가장 사랑하게 될 사람들과의 일상을 시작했다.


오랫동안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의 점령하에 있던 체코가 봄을 맞이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분신자살을 하며 민주주의를 외쳤고, 예술가들은 펜을 들어 민주주의를 써 내려갔다. 나치 독일과 붉은 군대가 물러간 자리엔 여전히 변방의 동유럽이라는 타이틀만이 남아 있었지만, 체코인들은 오랜 역사를 관광지로 탈바꿈시켰다. 스탈린의 거대한 흉상이 있던 레트나 공원에는 동명의 야외 바가 문을 열었고, 공산주의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역사가 되었다. 하지만 체코는 여전히 서유럽의 많은 나라들에 괄시받고 있었다. 


오래전 독일에서 들었던 한 수업에서 마누엘라 교수는 발카니제이션 Balaknization이라는 단어로 동유럽을 설명했다. 서구인들이 동양인을 오리엔탈리즘의 렌즈를 통해 바라보듯, 서유럽 사람들은 동유럽 사람들을 발칸 반도의 문제덩어리로 보는 것이다. 그 가운데 체코인들은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어느새 동유럽의 조그만 도시는 오랜 역사의 풍광을 간직한 채 새로운 힙스터 문화의 중심부가 되었다.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에 다시 젊은이들이 모인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프라하는 도구의 말마따나 여전히 관광의 맥락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했지만, 그 어느 유럽 도시보다 활기찬 곳이었다.


밀란 쿤데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고향 프라하를 싫어했지만, 팬더믹에 텅 빈 도시를 보며 시름에 잠겼다. 함께 살았던 플랫의 식구들은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다들 본국으로 떠났다. 프라하는 한산해졌고, 오랜 풍경은 적막에 잠겼다. 사람과 문화가 없는 프라하는 더는 매력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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