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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노 Mono Dec 28. 2021

영화관부터 골목길까지:
'시네마 천국'의 도시학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시네마 천국’(1988)은 표면적으로는 두 개의 플롯을 펼쳐다 놓는다. 하나는 영화에 매료된 꼬마 토토와 사람들에게 영화를 보여주는 것을 업으로 삼은 영사기사 알프레도의 우정, 다른 하나는 시간이 흘러 청년이 된 토토의 가슴 아린 첫사랑이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1940년대 초부터 1980년대 말까지, 영화는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을 달리며 두 주인공뿐 아니라 시골 소도시 사람들의 인간 군상과 소소한 나날들, 매체로서의 ‘영화’에 바치는 헌사까지 담백하게 담아낸다. 하나의 간명한 줄거리로 줄이기 힘들 정도로 다면적이지만, 그렇다고 난잡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영화의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면, 변하지 않는 것은 공간이다. 달력의 숫자가 아무리 바뀌어도, 이야기의 주된 배경은 이탈리아 어딘가의 소도시—마을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지안칼도, 그 안에서도 (영화의 원제이기도 한) ‘파라다이스 영화관’을 포함해 두세 장소밖에 없다. 영화가 그 몇 지점들만을 오가며 러닝타임 124분의 대부분을 할애한다는 사실은 꽤 흥미롭다. 방정식이 주어지면 우리는 보통 변수 ‘엑스’의 값을 찾는 데 몰두하지만, 그 옆에서 변하지 않는 상수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는 까닭이다.




지안칼도에 딱 하나 있는 파라다이스 영화관에는 사람들이 매일 밤낮으로 모인다. 찰리 채플린 무성영화부터 서부극까지, 상영되는 영화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지만 그곳에서 사람들은 항상 함께 울고 웃는다. 공포 영화를 보면서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남자에게 영화관은 만남의 장소가 된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자신만큼 겁 없는 여자와 눈이 마주친 그는, 그녀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영화관을 다시 찾는다. 자본가들에게 멸시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노동자들에게 영화관은 평등의 장소가 된다. 불이 꺼지고 필름이 돌아가기 시작하면, 모두는 다른 모두와 동등한 한 명의 관객으로 존재할 수 있고, 발코니에서 자신들에게 침을 뱉는 부자는 통쾌한 반격을—음식쓰레기 투척이라는 형태로—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래서 파라다이스 영화관은 무엇보다 공동체가 구축되는 곳이다. TV가 없거나 적어도 드문 20세기 중반의 이탈리아 지방 소도시에서,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들을 싼값에 제공하는 영화관은 강력한 힘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그렇게 이끌린 이들은 우연한 만남과 대화, 공감과 연대를 경험한다. 그리고 그러한 공적 상호작용의 경험들이 축적되어 하나의 정겨운 마을을 만든다.


늦은 밤, 영화를 틀어 달라는 사람들의 성토에 알프레도는 광장을 영화관으로 만들어 준다.


영화관이 지안칼도에서 수행하는 공동체적 역할은 유형으로서 광장의 그것과 닮았다. 실제로 영화관은 도시의 광장에 면해서 자리 잡고 있는데, 사람들은 광장에서 끼리끼리 모여 있다 영화관으로 들어가거나 영화가 끝난 후 “영화 좋군, 근데 끝이 슬프다” 하며 광장으로 나와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렇기에 영화관을 광장의 연속, 심지어는 광장의 일부로 볼 수도 있다. 영화관 주인이 문을 닫아야 한다며 관객들을 내보낸 늦은 밤, 영화를 틀어 달라는 사람들의 성토에 알프레도는 광장의 어느 건물 벽 쪽으로 영사기를 돌려 광장을 영화관으로 만들어 준다. 이 마법 같은 순간은 공간의 연장과 융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며, 토르나토레 감독 또한 영화관이 광장과 맺는 긴밀한 관계, 그리고 둘 사이의 공유된 공적 가능성을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지점이기도 하다.


영화관이 지안칼도에서 수행하는 공동체적 역할은 유형으로서 광장의 그것과 닮았다.


광장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이리저리 꺾이는 좁은 골목길들이 자리한다. 토토와 그가 사랑하는 엘레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이 골목들의 네트워크 위 어딘가에 산다. 마을에 하나뿐인 광장과 영화관이 공적인 삶의 무대가 된다면, 수많은 이름 모를 길들은 조금 더 사적인 삶의 배경이 된다. 토토의 어머니가 징집된 남편의 사진이 불탔다며 눈물을 흘리는 곳도, 토토가 매일 밤 엘레나에게 구애하며 홀로 서 있는 곳도, 사랑의 어려움에 아파하는 토토에게 알프레도가 가슴에 와닿는 이야기를 해 주는 곳도 골목 위다.


마을에 하나뿐인 광장과 영화관이 공적인 삶의 무대가 된다면, 수많은 이름 모를 길들은 조금 더 사적인 삶의 배경이 된다.


이것은 골목이 ‘집’이라는 궁극적인 사적 공간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지안칼도의 골목길은—유럽의 많은 역사도시들처럼—선형으로 이어지는 건물들의 길고 높은 외벽에 둘러싸여 안온하다. 외부 공간이지만, 건축 이론가 카밀로 지테가 주창한 것처럼 건물의 방과 같이 명확하게 정의된 경계를 가지는 ‘영역’인 것이다. 동시에 잦은 꺾임과 높낮이의 변화가 있기에 앞뒤의 시선에서도 일정 부분 차단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서로의 집을 침범하지 않고도 내밀하고 개인적인 상호작용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중재적 공간, 집의 본질적 개인성과 광장의 공동체성 사이 일종의 전이 공간이 된다.




인기 있는 영화관과 활기찬 광장, 아늑한 골목들을 가진 지안칼도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느슨한 연결과 가까운 사람들과의 강력한 연결을 모두 제공하는, 사회적으로 견고한 소도시 유형이다. 그렇기에 영화 내내 반복적으로 보이는 공간들을 통해 느끼는 정겨움의 정서는 ‘시네마 천국’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요소가 된다. 하지만 로마에서 성공한 영화감독이 된 중년의 토토가 몇십 년 만에 지안칼도를 찾았을 때, 파라다이스 영화관은 이미 폐관해 철거를 앞두고 있고, 광장은 자동차에 자리를 내준 채 주차장이 되어 있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만 같던 공간들의 변화를 보여주는 이 장면에서, ‘따뜻한 지역 공동체에 대한 진한 향수’가 토르나토레 감독이 의도한 주제 중 하나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토토가 몇십 년 만에 지안칼도를 찾았을 때, 광장은 자동차에 자리를 내준 채 주차장이 되어 있다.


영화의 의미는 현실 세계의 맥락 속에서 취득되고, 그 맥락이 달라짐에 따라 같이 변화한다. 영화가 개봉한 시기이자 그 안에서 다뤄지는 마지막 시대이기도 한 1980년대 말, 그 이후로도 빠르게 지속되고 있는 공적 생활의 쇠퇴와 지역 기반 커뮤니티의 해체를 생각한다. 개봉할 때는 주변적인 주제였을지 모르지만, ‘시네마 천국’이 우리의 도시와 공간, 그리고 그 안의 공동체에 대해 시사하는 바는 그 어느 때보다 바로 지금 더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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