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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씨 Jun 23. 2019

40년을 살며 한 번도 못했네요.

아빠에게 쓰는 편지 1

아빠.      


오늘 현이 글라이더 대회를 다녀왔어요. 믿어지세요? 고 녀석이 벌써 3학년이라니. 자그만 녀석이 꼬물꼬물 기어서 친하지도 않은 외할아버지 무릎에 올라가 어느새 세상 편하게 낮잠을 자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말이죠. 너무 엄하고 무서워서 나는 아빠 무릎은커녕 옆에 앉는 일도 없었는데, 현인 왜 그랬을까요? 유독 외할아버지를 따르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요. 하나밖에 없는 딸이 애교는커녕 말수조차 적으니 못다 한 소명을 손녀가 해주고 있는 듯해요. 계속 그렇게 외할아버지 곁을 쫓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어요.  

    

아빠와 함께 한 일상을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은 일곱 살 즈음이에요. 국민학교 입학을 앞두고 한글을 전혀 못 깨친 저를 밥상 앞에 앉히셨죠. 가 나 다 라 읽고 쓰기를 가르쳐 주셨는데, 하기도 싫었지만 틀려서 혼이 날까 너무 무서웠어요. 그래서 화장실 다녀온다고 거짓말하고는 할머니 집으로 도망가 버렸죠. 그 뒤에 아빠에게 더 혼이 났는지, 계속 공부를 했는지는 이상하게도 전혀 기억이 없어요. 아빠는 기억나세요?    

  

고된 일이 끝나고 동료들과 한잔 걸치시고 나면 가끔 통닭을 사들고 오셨죠. 기름이 봉지 밖으로 조금 새어 나와 누런 봉투가 얼룩덜룩해서 더 맛있어 보이는 통닭을. 아빠 발소리보다 통닭 냄새를 더 빨리 알아챘어요. 얼큰하게 취하실 때는 그래서 좋았어요. 기분 좋은 아빠를 만나는 순간이었거든요.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코가 삐뚤어지게 취하셨죠. 그런 날은 비상이었어요. 우리 삼 남매는 장롱에 숨거나 깊이 잠든 척해야 했어요. 아무리 큰 소리로 불러도 너무 곯아떨어져서 들을 수 없다는 듯이 잠든 척을 했어요. 그런 날의 아빠는 평소보다 더 무서웠거든요. 아빠 어깨에 지워진 짐의 무게를 그때는 몰랐어요. 아빠가 왜 그렇게 토해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모든 것을 감내하는 엄마만 안쓰러웠어요.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아빠를 벗기고 씻기고 눕히면서 온갖 분노를 다 감당하셔야 했던, 무시와 경멸을 당해야 했던 엄마가 너무 불쌍했어요.    

 

 20년쯤 지난 어느 날 밤, 계모임에서 거나하게 취해 들어온 아빠가 제 앞에서 우신 적이 있어요.      


"죽고 싶다. 내가, 내가 너무 힘들다. 아무 능력도 없는 아빠라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쪼그리고 앉은 자세로 고개를 푹 숙이고 딸의 눈조차 쳐다보지 못하고 내뱉은 그 말에 너무 슬프고 죄송해서 아무 대꾸도 해드리지 못했어요. 괜찮다고 아니라고 너무 감사하다고 아빠 힘들어하시지 말라고 속으로만, 속으로만 이야기했어요. 바보같이. 그 날 아빠를 안아드리지 못한 게 너무 후회돼요. 사실 아빠를 안아드린 적이 한 번도 없지만요. 그래도 그 날은 그 외로움을, 그 슬픔을 보듬어드렸어야 했는데, 하나밖에 없는 딸이 그랬어요.    

  

그 날 이후로 아빠가 보였어요. 아빠를 생각했어요. 아빠는 행복할까? 퇴직을 하고, 너무 길어진 하루를 보내는 게 힘드시다는 아빠는 지금 행복하세요? 등산이 유일한 낙이었는데, 그 마저도 지난가을 무릎인대가 찢어지는 바람에 수술까지 받으시고 이제는 지팡이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죠. 조심히 아주 조금만, 산자락만 밟고 계시다는 말씀에 가슴이 아팠어요. 그래도 ‘아 난 아빨 닮았구나’ 생각한 게 있어요. 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빌려보신다고 하신 말씀에 기뻤어요. 책이 우리의 연결고리였구나 싶었죠.     


고맙습니다 아빠.

     

그래서 어제 서점에 갔다가 아빠가 좋아하실 만한 책을 두어 권 샀어요. 일단 제가 다 읽고 감상을 써서 아빠에게 보내드리려고 해요. 너무 멀리 떨어져 아빠와 마주 앉아 책 이야기를 나눌 수 없으니 그렇게라도 하고 싶어서요. 아빠도 꼭 감상 써주시길 바라요.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아빠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네요. 엄마는 아빠가 월남전에 갔었을 때, 사우디아라비아에 일하러 가셨을 때 받은 편지를 간직하고 계시더라고요. 전 아빠 손편지 받아본 적이 없으니 꼭 써주세요. 받고 싶어요. 아빠의 글을.      


편지를 쓰다 보니 배가 고파요 아빠. 낮에 사놓은 컵라면 생각이 자꾸 나서 오늘은 그만 쓸게요. 없으면 안 먹는데 라면이란 녀석 너무 무서워요. 눈이 마주치면 이길 수가 없어요. 아빠는 잘 모르시겠지만 제가 워낙 표현을 못하니 그래서 더 아빠 생각이 나요. 요즘은 특히 더 그래요.


엄마와의 거리가 참 가깝다 여겼는데 아빠는 실은 저에게 너무 많은 영향을 주셨어요. 지금 나의 삶의 태도, 버릇, 말투 많은 것들이 아빠와 연결되어 있어요. 솔직히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해요. 자식에게 좋은 것만 물려주고 싶은 맘 저도 엄마가 되어보니 알겠어요. 부모가 원해서 그렇게 된 건 아니지만 좋은 점만 받았음 하는 말도 안 되는 아쉬움 말이에요. 아빠를 탓하는 건 아니에요. 현이도 제가 가진 싫은 모습을 어쩜 그렇게 쏙 빼닮았는지 속상할 때가 많아요. 스스로를 돌아보게도 되고요.      


이 편지를 부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뭐든지 처음은 너무 어렵잖아요. 용기를 내보자 다짐하고는 있지만 자신이 없는 것도 사실이에요. 해바라기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빈센트 아시죠? 그는 동생 테오와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데요. 테오가 잘 보관해 둔 편지 덕분에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힘들었을 당시를 더 잘 알게 되었고요. 어쩌면 아빠와 주고받을 편지로 저도 내가 몰랐던 아빠를 만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란 기대가 들어요.       


아빠 또 편지할게요.   

  

                                                                                       아빠에게 문득 편지가 쓰고 싶어진 어느 날에 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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