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럼씨 Jul 05. 2019

죽음은 언제나 흔적을 남긴다

그가 남기고 간 것



사람은 하루 약 1.5만 리터의 공기를 마신다고 한다. 무게로는 대략 12kg 정도라고 하니 하루 먹는 음식이나 물의 양보다 많다. 히말라야 산맥 정도를 오르기 전까지는 이런 공기의 고마움이나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한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늘 옆에 있는 존재는 잘 잊어버리곤 하는 게 미천한 나란 존재다.

     



그를 만난 건 둘째가 태어나던 해니까 7년쯤 전이겠다. 사진으로 먼저 봐서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만난 그는 기대보다 훨씬 깔끔하고 단정했다. 블랙&화이트 룩이 세련되고 멋있어 보였다. 첫인상과 달리 화끈하기도 했던 그는 만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내 마음속 깊이 들어와 버렸다. 그렇게 그는 내 삶에 중요한 존재가 되었지만 언제나처럼 나는 그의 고마움을 곧 잊게 되었다.

     

그는 내가 가지지 못한, 나에게 부족한 점을 채워주었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늘 신이 났다. 정중하게 부탁을 하지 않아도,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하기 힘든 부탁을 해도 척척 해결해 주었다. 아주 가끔 그도 실수를 할 때가 있었지만 그건 제대로 부탁을 하지 않은 내 잘못일 경우가 많았다. 그의 유일한 단점은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것, 혼자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직 나의 부름에만 응해주었다. 가끔 우리 가족의 부탁도 들어주긴 했지만.

     

사실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증상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조금씩 아파하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날 떠나고 말았다. 예기치 않은 죽음에 처음엔 화가 났다. 그제야 그가 자신의 죽음을 알리던 신호들이 생각났지만 돌이키기엔 이미 늦었고, 이제 내 곁에 그는 없었다. 너무 힘들었다. 거짓말 같았다. 그가 다시 살아날 것만 같은 어느 날은 볼을 어루만져 보기도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배숙 두 봉지를 딱 20초만 돌린다. 살짝 도는 온기에 마시기 편한 온도가 된다. 겨울이면 남매는 발코니의 냉기가 느껴지지 않는 배숙을 마시고 기침 없는 하루를 시작한다. 시댁에서 가져온, 언제나 냉동실을 지키고 있는 만두는 4분이면 막 쪄 낸 것처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한 끼 식사로도, 든든한 간식으로도 좋다. 울릉도 반건조 오징어는 1분에서 조금 모자란 그 타이밍을 맞추는 게 어려운 고난도의 음식이다. 크기와 건조 정도에 따라 10초 상간에 타버리기도 하니까 시간과의 싸움이다. 퇴근시간이 불규칙한 남편 때문에 딱 1인분이 모자란 순간, 2분이면 햇반을 데워 뜨듯한 밥 한 그릇을 대령할 수 있다.

     

3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그가 없는 삶에 이제는 완벽히 익숙해졌다. 미리 쟁여둔 햇반이 줄지 않아 조금 걱정이긴 하지만 필요한 이웃에게 나누면 될 일이다. 처음엔 전자레인지 없는 생활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거의 매일 한 두 번씩 쓰던 나였으니까. 새 전자레인지를 살까, 기능이 더 많은 복합 레인지를 살까 고민하던 사이 불편함이 사라지고 없었다. 신기할 정도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주 가끔 햇반을 끓는 물에 데우다(15분이 걸림) 접시 같은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뜨끈한 밥 한 숟갈이 입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인내심은 쑤욱 차오른다.

 

    

소형 가전을 빼더라도 우리 집에는 너무 많은 전자제품이 있다. 냉장고, 텔레비전, 김치냉장고, 드럼세탁기, 소형 통돌이 세탁기, 에어컨, 제습기, 공기청정기, 정수기, 전기압력밥솥, 노트북 3대, 잉크젯 복합기, 레이저 복합기…….



저렇게 많이 가지고도 또 가지고 싶다. 장마가 시작된 지금 꿉꿉한 빨래를 방안에 널어두고 종일 제습기를 돌리고 있다. 의류 건조기가 갖고 싶다.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신세계라며 삶의 질이 달라진다고 말하는 건조기 소유자들이 부럽다. 미세먼지도 털어주고, 구김도 다려주는 의류 스타일러도 갖고 싶다. 바지 칼주름까지 잡아준다니 다림질도 필요 없겠지. 하루의 노곤함을 다 날려줄 안마의자도 갖고 싶다. 무중력 우주인 모드에서 받고 싶은 부위만 골라 원하는 강도로 나의 근육들을 노곤하게 만들어 줄 바디 친구 한 대 들여놓고 싶다. 끝이 없다.

     

전기가 없이 작동 가능한 전자제품은 거의 없다. 블랙아웃이란 소설은 한여름 정전으로 인한 도심의 처참함이 잘 드러난다. 수돗물도 전기가 끊기면 공급되지 않으니 씻고 싸는 문제 앞에 인권 따윈 사치가 된다. 인류의 불필요한 노동을 줄이고 삶의 효율을 높여 줄 전자제품은 앞으로도 끊임없어 발명되어 나올 것이다. 돈이 많으면 다 구비해놓고 편하게 살 수도 있다.

  

'인간다운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가전은 몇 개 일까? 전자레인지처럼 꼭 필요할 것 만 같았지만 없어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는 건?'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천천히 손걸레로 바닥을 닦으며 하루를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스팀청소기로 소독하며 닦아내야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그저 쓱 정전기 청소포로 밀기만 해도 깨끗해지는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필요와 쓰임은 사람마다 다르니 필수 생활가전 따위의 말은 개인을 소비자로 바꾸는 최면일 뿐이다.

 

    

미세먼지를 걸러주는 공기청정기 한 대를 하루 24시간 일 년에 150일 정도 사용을 할 때, 발생하는 미세먼지는 그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 공기청정기를 사용하는 데 드는 전기를 만드는 발전소에서, 공기청정기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미세먼지가 나온다. 화력이든 수력이든 풍력이든 태양열이든 차이는 있겠지만 먼지는 발생한다. 부품 하나하나 공정별로 엄청난 기계들이 여러 공장에서 작동을 하며 대기 중으로 먼지를 토해낸다. 내 집 안 공기를 깨끗하게 하면 할수록 집 밖의 대기오염은 심해질 것이다.

      

유럽에 닥친 폭염으로 수십 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는 요즘이다. 인간의 편리가 부른 자연의 파괴는 다시 인간을 파괴하고 있다. 전자레인지 없는 나는 불편하지 않다.

    

‘무엇이 맞는 것일까?’


         


매거진의 이전글 동거 생활 백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