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럼씨 Jun 30. 2019

동거 생활 백서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읽고

우리 가족의 분자식을 굳이 쓰자면 W₂M₂(여자 2, 남자 2) 거나 A₂T₁K₁(성인 2, 청소년 1, 어린이 1) 정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나는 이렇게 쓰고 싶다. 

'P₃K₁' 

풀어보자면 박 씨 성을 쓰는 세 명과 강 씨 성을 쓰는 한 명의 가족 형태가 되겠다. 한국의 결혼제도는 아직 대다수 부계혈통을 따르므로 여기서 강 씨는 여성이자 엄마임을 파악할 수도 있다.      


P₃K₁의 가족은 몇 가지 동거 규칙을 가지고 살고 있다. 규칙의 대 원칙은 ‘자기 일은 각자 스스로’이다.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순간 고성이 난무하고 공감과 소통의 이념은 쓰레기통으로 처박히기도 한다. 이보다 더한 순간은 개개의 ‘자기일’의 영역이 교집합을 이룬 순간과 모두의 합집합 안에도 들지 않는 ‘누군가의 일’이 발생했을 경우이다. 그 혼란의 순간들을 이겨내고 우린 지난 십 년간 잘 살아왔다. 아니 잘 살아왔다고 믿고 싶다.  

   

모두의 일에서 나의 일을 구분하기 위한 규칙 중 하나는 식사를 준비한 사람은 설거지에서 제외된다는 것이다. 보통 내가 밥을 차리면 나머지 세 명은 누가 설거지를 할 건지 내기를 하기도 한다. 설거지 양이 많은 날에는 신랑이 3분의 2 정도를 해버리고 나머지를 두 아이들에게 넘겨준다. 그렇지 않고 각자 밥그릇 정도만 나오는 날이면 가위 바위 보를 한다. 

     

지난주 금요일 저녁에는 식사 준비를 셋이서 했다. 설거지 당번은 밥이 차려질 때까지 신나게 놀고만 있었던 막내의 몫이 되었다. 당연하게도 혼자 남게 된 막내는 알 수 없는 억울함과 외로움에 떼를 부렸다. 성숙한 어른 두 명과 조금 더 성숙한 열 살 초딩은 일곱 살의 무지막지한 떼를 용인해 주기로 했다.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 난 여유에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난 공평하게(?) 다 같이 가위 바위 보를 하자고 제안했다. 아직 성숙함과 여유가 10퍼센트 정도 부족했던 남편은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이 소요가 길어져봤자 기분 좋은 저녁을 망칠 확률이 높다는 건 그간의 경험으로 확신할 수 있던 남편은 곧바로 수긍을 했고 긴장 속에서 손을 내밀었다.   

   

"가위 바위 보!"     


주먹 세 개와 가위 하나가 나왔다. 가위 하나를 낸 사람은 삼세판을 제안했다. 1승을 쌓은 승자들은 여유가 조금 더 있는 법, 주먹 세 개를 낸 사람들은 살짝 불안하지만 제안을 받아들였다. 접전을 거듭한 끝에 마지막 한판에서 다시 주먹 세 개와 가위 하나가 나왔다. 패자는 처음 가위 하나를 내고 승복할 수 없었던 남편으로 결정되었다. 사실 이 날 식사의 메인 셰프로 불 앞에서 더위와 냄새와 싸우며 맛있는 식사를 준비했던 신랑은 억울할 만했다. 평소대로라면 설거지 제외 100퍼센트인 포지션이었기에 더욱. 패배를 받아들이고 설거지통으로 향하는 남편의 뒷모습이 그날따라 안쓰러워 보였다. 그래도 도와주지는 않았다. 승패의 세계는 냉혹한 법이니까.

     

설거지를 내어주기까지 가장 힘들었던 건 설거지를 늘 해오던 나였다.


1년 좀 안 되는 연애기간 동안 알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생활방식과 차이들로 우리는 끝도 없이 싸웠다. 결혼 2년 차에 접어들었을 무렵 서로를 인정하고 포기하기 시작하면서 싸움은 잦아들었다. 이 사람과 앞으로 몇십 년을 살 수 있을까? 내가 바른 선택을 한 것일까? 결혼이란 건 이런 것일까? 온갖 회의와 부정으로 가득한 나는 10년을 사귀다 결혼을 해도 똑같다는 친구의 말에 조금 위안이 되었다. 연애기간과 상대방의 이해도는 비례하지 않았고 집 밖에서의 만남과 집 안에서의 생활은 진심 천지차이였다. 

     

일을 마치고 와 샤워를 하고 그날 입었던 속옷과 양말을 같이 빨아 너는 게 남편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처음에는 참 바지런한 사람이구나, 일을 덜어주는 게 고마웠다. 그러다 피곤한 일상에 손빨래까지 하는 남편이 안쓰럽기도 했고, 세탁기를 돌릴 때 고작 옷가지 2개를 더한다고 수도요금이나 전기요금이 더 나오는 것도 아니니 오히려 더 효율적이라 생각해서, 그러지 말기를 권했다.    

  

지금은 이틀에 한번 꼴로 두 짝 중 하나를 뒤집어 벗어놓는 양말이 꼴 보기가 싫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날에는 그대로 씻어 널어 말린 후에 옷장에 넣어두기도 한다. 루틴이 된 습관을 굳이 바꾸고서는 불만이 쌓여가는 꼴이라니,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했고, 스스로 발등을 찧은 나의 잘못이다. 따지고 보면 나를 위한 배려였고, 내 입장에서의 불만이었고, 다시 나를 위한 개선 요구였다.   

    

동거 10년에서 1년 부족한 이 시점에도 내 시선에서만 바라보고 갈등 중인데, 2년여 만에 슬기로운 동거생활을 터득한 김하나와 황선우가 대단하게 보였다. 나는 몰랐던 것일까, 나만 몰랐던 것일까, 대부분 모르는 것일까. 도대체 중·고등학교 가정 가사 시간에 바느질보다 더 실용적인 동거생활백서 같은 걸 왜 가르쳐 주지 않는 걸까.      



자신과 다르다 해서 이상하게 바라보거나 평가 내리지 않는 건 공존의 첫 단계다.     



청각의 예민함과 신체적 둔감함을 두루 갖춘 나란 사람은 어찌 보면 맞추어 살기에 너무 복잡한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열대어 키우는 취미를 가진 남편에게 여과기 소음 때문에 불면을 호소하고, 기념일 따위는 신경 쓰지 않으며, 상대방의 기분을 단박에 알아차리는 눈치도 장착되어 있지 않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집에 포장을 해오고, 포장하기에 먼 거리에서는 택배로 부쳐놓고, 기념일이란 기념일은 다 챙겨주고, 아무 날도 아닐 때 꽃다발을 쓱 내미는 남편이다. 자기애가 강한 만큼 타인을 사랑하는 법도 잘 아는 사람에게 나는 늘 서운하고 섭섭한 존재였던 것 같다.

     

익숙해짐.


내가 존경할 만한 부분을 갖고 있으며, 거의 모든 질문에 답을 해주는 남편의 장점은 시간이 지날수록 공기 같은 필수옵션이 되어버렸다. 백번 잘하다가 한 번 실수하면 찍히는 것처럼 늘 나를 먼저 생각하고 챙겨주는 남편의 고마움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서운하고 부족하고 이해 못해주는 것들만 계속 붙들고 살아왔다.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 들어가든 동거라는 느슨한 관계 속에 들어가든 같이 사는 사람에 대한 태도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뒤집어진 양말이 보기 싫다면 뒤집어 놓을 때까지 계속해서 말하는 인내를 갖거나, 뒤집어진 양말을 다시 까뒤집을 그릇을 키우거나, 그 상태로 빨아 던져놓을 무던함을 가지면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불만만 키워가는 건 관계에 대한 나의 책임을 다하지 않은 채 상대의 의무 부족에 문제제기만 해대는 꼴이다. 

     


함께 사는 사람, 같이 살아가야 하는 사람과의 싸움은 잊어버리기 위한 싸움이다. 삽을 들고 감정의 물길을 판 다음 잘 흘려보내기 위한 싸움이다. 제자리로 잘 돌아오기 위한 싸움이다.  



싸움을 만들지 않는 법을, 피하는 법을 익혀온 내가 성숙했구나, 이 결혼 생활을 잘 해내고 있구나 싶었다. 그런데 책에서 이 문구를 읽는 순간 나는 결국 회피하고 살아온 거란 걸 알았다.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고 순간순간을 모면하며 지내왔던 것이다. 내가 불편한 지점을 끄집어내 말하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며 혹여 싸우게 되더라도 감정 소모만으로 끝내지 않도록 노력했어야 했다. 내가 다치지 않으려고 상대를 제대로 바라봐주지 않았다. 

    


비슷한 점이 사람을 서로 끌어당긴다면, 다른 점은 둘 사이의 빈 곳을 채워준다.    


  

정작 이기적인, 강한 자기애를 장착한 건 나였다. 나의 빈 곳을 채워주는 사람의 사랑을 신뢰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쉬지 않고 채워주기를 바라면서 나는 정작 그의 빈 곳을 채워줄 노력을 게을리해왔다. 언제나 노력하겠다는 말만으로 그 긴 시간을 버텨오다니 나도 내가 참 대단하다. 

   

동거생활백서. 김하나와 황선우의 책을 그렇게 부르겠다. 마음이 울적한 어느 순간, 어느 페이지를 열어봐도 도움이 되는 정혜신 박사의 <당신이 옳다>처럼 동거인과의 힘겨운 부침의 순간 어느 페이지를 열어 읽어도 도움이 될 책이다. 책 한 권으로 나의 반성과 결심이 실행되지는 않을지라도 다시 책을 펼칠 힘은 생겼다. 적어도 외면하지는 않겠지.      


동거생활백서


매거진의 이전글 햇살은 내가 원하는 만큼 집안으로 들일 수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