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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씨 Jun 17. 2019

햇살은 내가 원하는 만큼 집안으로 들일 수 없다.

기생충을 보고 나서

‘비가 오나?’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거의 없고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어둑어둑했다. 우산을 챙겨 들고 현관문을 열었다. 쨍쨍한 하늘이 나를 비웃고 있었다. 손에 든 우산을 누가 볼까 얼른 뛰어 들어가 던져놓고 나왔다. 

    

친구 지아네 집에 가면 늘 첫날은 그렇게 깜빡깜빡했다. 반지하의 어둠에 쉬 익숙해지지 않았다. 지아는 부산에서 학교를 마치자마자 서울로 취업을 했다. 비싼 물가와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지아의 첫 자취는 연립 반지하 단칸방이었다. 

   

지아의 네 번째 집은 가장 넓었지만 가장 어둡고 눅눅했다. 인도 쪽으로 나 있는 창은 방범과 프라이버시를 위해 일 년 365일 내내 커튼이 걷히지 않았다. 빌라로 들어오는 옆 창문은 불투명 유리로 되어 있었다. 햇살과 바람이 뚫고 들어올 여지가 전혀 없었다.  

   

현관문을 열면 곰팡내가 훅 내 코를 찔러왔다. 여름에는 빨래가 가장 곤욕이었다. 햇살 좋은 한 여름에 반나절이면 마를 옷가지들은 반지하에선 선풍기를 종일 틀어놓아도 이틀은 지나야 했다. 지아네 집에 머물었던 그 시간들에 난 한 번 입은 옷을 세탁기에 돌리지 못했다. 뽀송뽀송함은 사치였다. 아무리 오래 말려도 꿉꿉함은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반지하 특유의 냄새는 늘 나를 괴롭혔다. 지아도 알고 있었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지아가 살아가고 있는 곳이니,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감기나 호흡기 질환에 걸리지 않고 건강한 지아에게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누구보다 먼저 가장 일찍 출근해서 가장 늦게 퇴근을 했던 지아, 토요일에는 일의 연장으로 외출을 했고, 하루 쉬는 일요일에도 대개 월요일에 있을 회의 준비를 했다. 연애를 할 시간도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한 달에 한번 엄마가 보내준 반찬은 그대로 버려지기 일쑤였다.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지아는 왜 항상 반지하에 살아야 하는지 어린 그 시절에는 알지 못했다. 세상은 밝고 화창한데 지아네 집은 어둡고 눅눅했다. 지아는 맑고 건강한 아이였는데, 지아의 삶은 출구 없는 터널 같았다. 왜 누군가는 노력도 없이 햇살을 듬뿍 받고 있고, 누군가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도 한줄기 작은 빛에 감사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상은 한 개인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그저 서로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집합인 것일까?     


기생충을 보는 내내 기택의 반지하는 슬프기도 했고, 아프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많은 이들이 반지하에서 살고 있다. 해도 잘 들지 않고, 먼지도 많고, 소음도 심하다. 환기도 어렵고, 빨래 건조도 용이하지 않다. 불을 켜기 무섭게 사사삭 사라지는 바퀴벌레들과도 동거해야 한다. 기택네처럼 보고 싶지 않은 더러운 꼴도 원치 않게 눈에 들어온다.     


그런 반지하의 위생을 생각해 기택은 소독액을 집안으로 들인다. 막 튕겨낸 곱등이가 사라질지는 몰라도 기택 스스로 충이 된 것 같은 기이함에 영화 초반부터 불편함이 느껴졌다. '안락의자에 앉아 팝콘을 집어 먹으며 느긋하게 감상할 영화는 절대 아니야. 2시간 내내 잔뜩 웅크린 채,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키라고. 그렇게 봐야 할 영화야'라고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박 사장의 집은 기택의 집과는 극과 극의 위치에 있었다. 이음새 하나 없는 넓은 통유리로 쏟아 들어오는 햇살 가득한 거실이라면 누구나 행복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집이었다. 거대하지만 안락함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불이 다 꺼진 캄캄한 밤에도 어둡다고 느껴지지 않는 밝음이 그 집 전체를 감싸고 있는 듯했다. 그게 뭐였을까? 충숙의 말대로 돈으로 쫙 다려 구김이라고는 전혀 없는 부유함의 여유일까? 넓고 깨끗하고 심지어 건축가가 지어 아름답기까지 한 이 집에 대한 나의 동경이었을까?    

 

지금 내가 사는 집은 아파트 7층이다. 해도 잘 들어서 앞 발코니에서는 방울토마토, 상추, 오이, 수박, 고추도 키우고 있다. 오늘 날씨가 맑은지 흐린 지 아침에 눈을 뜨고 커튼을 걷지 않아도 새어 들어오는 빛의 양으로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세상이 밝고 화창하지만은 않다. 나도 언제든 기택의 반지하로 내려갈 수 있지만, 박 사장의 대저택으로는 절대 올라갈 수 없다. 햇살은 내가 원하는 만큼 집안으로 들일 수 없는 게 우리의 삶이다.   

   

몇 년 전 혼자 사업을 시작할 때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사업에 실패하면 반지하에 살아야 할지도 몰라. 괜찮겠어?” 반지하는 그렇게 삶의 바닥으로 다시 다가왔다. 돌고 돌아 충숙과 기우는 빗물에 잠겨 똥물을 토해내던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기택은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으로 아예 잠겨버렸다.      


바닥이라고 생각했던 반지하는 그래도 햇살을 손에 잡아볼 수 있는 기회라도 있었다. 기택의 목소리에 답장을 쓴 기우는 전할 방법조차 없었다.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고 그저 혼자 내지르는 소리가 어딘가 가 닿기를 기도할 뿐인 기택의 삶 또한 내가 갈 수도 있는 곳이란 생각이 들어 무서웠다. 나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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