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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씨 Jan 20. 2021

내가 여행을 떠난 진짜 이유

죽음 각오로 떠난 설국 여행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방향을 틀어 집으로 돌아가는 게 맞지 않을까 싶었지만, 남편에게는 직진뿐이었다. 두려움을 숨기고 공포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아이들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아름다운 설경을 즐기자고, 우린 여행 중이라고. 그 순간 반대편 차선에 눈 속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자동차가 보였다. 1분 일지 1시간 일지 모를 우리의 미래가 분명해 보였다. 표지판도 사라졌고 차선도 사라졌고 10m 앞도 보이지 않았다. 눈보라는 계속 불고 있었고 간혹 보이는 차들은 비상등을 켠 채 기어가거나 멈춰있었다. 우린 잠시 미쳤던 게 분명했다.        


                             보조석 창 밖으로 보이는 눈앞 도로. 어디쯤인지 어디를 달리고 있는지...




어제부터 내린 눈으로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했다. 눈이 오는 날에는 뜨끈한 바닥에 배를 붙이고 엎드려 만화책을 보면서 과자를 없애버리는 게 진리다. 남매가 썰매를 들고나가자고 하지 않기를 간절히 속으로 기도하며 자세를 잡았다. “내일 금요일이고 하니 오랜만에 가족여행이나 갈까? 눈도 오니 설경도 볼 겸 어때?” 남편이 거실로 나오며 말했다. 방구석을 사랑하고 추위를 지독하게 싫어하는 나는 순간 본능을 거부하며 솟아오른 가족애로 그릇된 결정을 하고 말았다. “그럼 그냥 오늘 갈까? 내일 눈이 녹을지도 모르고. 숙소 알아볼게.” 오전 10시니까 점심을 먹고 바로 출발하면 충분히 놀고 오겠다 싶어 숙박 앱을 열었다. 그때라도 날씨 앱을 잠깐 켰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코로나로 그 좋아하던 워터파크 한 번 가보지 못한 남매를 위해 스파펜션을 골라 예약을 했다. 눈은 그쳤고 시내를 잠시 나갔다 온 남편은 제설도 다 끝났다고 말했다. 굳이 눈길 서행을 생각해서 일찍 나설 필요는 없겠구나, 짐을 쌌다. 햇살이 내리쬐고 눈이 녹고 있는 도로는 질척거렸다. 딱 5분. 그래 우린 5분 정도 행복했던 것 같다. 아니 조금 더 길었던가? 시내를 벗어나 외곽으로 빠지는 순간 그때라도 우린 차를 돌렸어야 했다. 제설되지 않은 도로와 흐려지는 하늘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실 모른 체했다. 오래간만에 떠난 여행의 출발부터 불안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곧 나아지리라 희망을 품은 채.        


  


부산은 눈이 잘 내리지 않았다. 강원도민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십 센티미터 넘게 쌓인 눈길을 뽀드득뽀드득 소리 내며 걸을 수 있는 그곳의 아이들이 부러웠다. 영화 러브스토리의 두 주인공이 순백의 하얀 눈밭에 그대로 푹 쓰러지는 모습은 죽기 전에 해야 할 버킷리스트기도 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쌓일 정도로 눈이 내렸던 적이 두어 번 있었다. 부산 사람들에게는 올해 첫눈이라던가, 올겨울 첫눈 따위의 단어는 없었다. 내 생애 첫눈이라던가, 내 생애 처음 쌓인 눈을 본다던가 라는 느낌만 있을 뿐이었다. 한 시간 넘게 눈덩이를 굴려봤자 무릎에도 오지 못하는 작은 눈사람이 만들어질 뿐이었다. 유럽의 삼단 눈사람은 기적에 가까운 꿈이었다.        


   

셋이 뒤로 벌렁 누워 나의 버킷리스트를 실현하기 직전. 아쉽게도 그 사진을 찍지 못했다


부산을 떠나니 눈 천지였다. 한반도에서 부산만 눈이 그렇게 안 내리다니 지지리 복도 없던 출생지였다. 30여 년 가까이 눈에 대한 동경은 그 뒤로 만난 엄청난 눈들에도 쉬 채워지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눈이 오면 마냥 좋고, 차가 막혀도 차가 멈춰도 길이 꽝꽝 얼어도 좋았다. 불편해도 눈 자체는 언제나 반가웠다. 이제 나의 버킷리스트는 스위스 같은 북유럽에 가서 겨울 왕국을 진하게 느껴보는 걸로 바뀌었다. 신비스러운 오로라와 쏟아질 듯한 별바다에 한 번 풍덩 빠져보고 싶다. 내면에 늘 숨어있던 그런 마음 때문에 이 여행에 어떤 망설임도 없이 평소와 다른 선택을 했던 게 분명했다.           


남편은 단단한 사람이었다. 자기 확신으로 삶의 흔들리는 순간에 늘 나를 붙잡아줬다. 베스트 드라이버이자 나의 운전 스승님인 그는 끝없는 불안으로 흔들리는 나를 계속 붙들어 주었다. “이 정도 길은 많이 다녀봤어. 차라리 눈이 많이 쌓이고 우리가 처음으로 지나가면 안전해. 미끄러지지 않을 테니 걱정 마.” 숙소를 십여 분 남겨두고부터는 제설된 도로가 나타났다. 안심하는 순간 눈앞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길이 무섭게 솟아올랐다. 남편도 처음으로 긴장을 하는 듯했다. 빠른 속도로 멈추지 않고 가면 충분히 오를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던 말고 달리 차는 멈추고 말았다. 액셀러레이터를 아무리 밟아도 속도계는 5 이상 올라가지 않았고 급기야 빙글 돌기 시작했다.           


“겨울 왕국 아니고 지옥 왕국인데~” 아들은 엄마 아빠의 눈속임에 넘어가지 않고 상황판단을 정확하게 했다. 지금은 설경을 구경할 때가 아니라 살아서 이 길을 통과해야 할 순간이라고. 말끝마다 죽음을 뿌려대는 아들 입을 닫게 할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 시간 반을 달려갔는데 코앞에 숙소를 두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게 생겼다. 차를 돌려 오르막을 내려왔다. 바퀴에 눈을 털어내고 제설 스프레이를 뿌린 뒤에 부릉부릉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제발, 제발 이 언덕만 오르게 해 주세요’ 이럴 때는 내가 무신론자인 게 참 야속했다. 믿음도 없는 신을 부를 수는 없으니 자동차에 빌었다. ‘QM아 힘내!’     




다음 날 숙소 앞 바닷가 눈 덮인 모래사장 위로 첫 발자국을 찍어보았다.



거대한 스파 욕조에 뜨거운 물을 가득 받고 온 가족이 몸을 담갔다. 창밖으로는 해가 지는 서해가 펼쳐져 있었고 흰 눈이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남매는 그런 풍광 따윈 전혀 관심도 없이 오랜만의 물놀이에 빠져 정신이 없었다. 우리는 왜 굳이 험난한 눈길을 뚫고 여길 왔던가. 시내 숙박업소를 찾았어도 상관없을 녀석들을 보니 헛웃음만 나왔다. 펜션 주인은 이 날씨에 당일 예약을 하고 어렵게 도착한 우리 가족이 대단했는지 추가 비용을 받지 않았다. 엄마는 아줌마는 이런대서 행복을 느꼈다.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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