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산 탄다(6)
때는 바야흐로 설날을 맞아 고향에 내려갈 즈음이었다. 등산에 한창 미쳐있던 나는 고향 가서도 등산할 생각밖에는 없었고, 근처 100대 명산이 뭐가 있는지 열심히 서치 해본 결과 인근 100대 명산인 천성산에 오를 계획을 일정에 꾸역꾸역 집어넣었던 것이다. 등산화까지 챙겼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 무겁고 부피 큰 등산화까지 야무지게 챙겨 다닐 만큼 등산 열정이 불타오르던 시기였다. 어지간하면 운동화 신고 등산을 했을 터인데 천성산에 대해 알아본 결과 결코 만만히 오를 수 있는 산이 아니라는 판단 하에 등산화까지 챙겨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등산화를 안 챙겨 갔더라면 천성산을 어찌 올랐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할 만큼 상상 초월 거친 날 것의 탐험을 방불케 하는 스릴만점(이라고 쓰고 생고생체험이라 읽는다)의 등산이었던 것이다.
엄마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오랜만에 보는 딸내미가 등산에 미쳐서 하루 종일 산을 쏘다닐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셨나 보다. 명절선물세트 대신 등산화며 등산스틱 따위를 챙겨 온 딸내미를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시며 '집에 내려오는데 이게 다 뭐야?'라고 다소 황당한 듯 물어보셨다. 엄마는 소싯적 날쌘 다리로 산을 날다람쥐처럼 쏘다니셨던 등산 고수셨다. 그런 엄마의 눈에 등산과는 거리가 먼 딸이 등산용품을 잔뜩 챙겨 왔으니 어이가 없음이 당연했다.
'엄마 저 요즘 등산하기 시작했어요~ 집 근처에 천성산이 유명하던데 이번에 거기 등산해 보려고요~'
엄마가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평소에 운동도 안 하는 네가 무슨 등산이냐고 되물었지만 나는 기죽지 않고 등산 고수 엄마 앞에서도 위풍당당하게 등산용품을 정리하며 등산인의 면모를 과시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첫 번째 난관 : 길 없는 풀숲을 헤쳐서 나아가라!!!
두 번째 난관 : 푹푹 빠지는 늪지대를 헤쳐서 나아가라!!!
세 번째 난관 : 해가 지기 시작한 정상에서 제시간에 하산하라!!
명절의 아침이 밝아오고,,, 드디어 벼르고 벼르던 천성산 등산을 위해 서둘러 집을 나섰다. 명절 댓바람부터 등산이라니 누가 봐도 제정신이냐 싶을 일정이지만 그런 남들의 시선(엄마의 시선을 포함하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등산할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하지만 역시 길치인 나에게 천성산은 초반부터 쉽지 않은 등산을 예고하는 듯했다. 분명 지도 보고 찾아간 등산 초입인데 이상하게 아스팔트 꼬부랑길이 계속 펼쳐졌다. 길 근처에는 정신병원이 으스스하게 위치해 있어서 과연 이 길이 맞는 길인지 계속 의구심이 들었지만 지도를 믿는 방법 외에는 딱히 다른 길이 없었다. 이 길이 맞겠거니 하고 아스팔트길을 따라 계속 올라갔더니 인적이 거의 없는 오솔길이 나타났다. 간간히 사람 발자국이 있어서 살짝 안도감을 느끼며 오솔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니까 이제는 송전탑이 눈앞에 나타났다. 길은 송전탑 아래를 지나서 연결되어 있었다. 맙소사... 분명 올라오기 전에는 저 멀리서 보였던 송전탑인데 어째서 지금 내 바로 앞에 송전탑이 있는 거지? 여길 지나가도 되는 건지 아리송했지만 이제 와서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갈 수도 없으니 그냥 지나가기로 맘먹고 오솔길을 따라갔다. 이제 송전탑은 바로 머리 위에 거대한 모아이 석상처럼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혹시나 지나가다가 감전되는 건 아닌가 괜히 졸아있었는데 다행히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분명한 건 이 길이 일반적인 등산로가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어떻게 산에 갈 때마다 이렇게 엉뚱한 길만 골라서 오는 건지 스스로가 참 한심하면서도 웃겼다. 누가 길치 아니랄까 봐 남들 다 가는 길 놔두고 꼭 이런 오지체험 같은 길로만 가게 된다. 뭐 어쨌든 정상으로만 향한다면야 큰 문제는 없으리라 믿는 이 대책 없는 낙관론자에게 중도하산이란 없으니 계속해서 등산을 이어갔다. 하지만 오지체험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으니...
모아이 석상처럼 우뚝 선 송전탑을 지나 중간중간 나뭇가지 사이에 매달린 형형색색의 리본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현란한 색상의 리본에는 ㅇㅇ산악회, ㅁㅁ산악회 등등 색상만큼이나 현란한 네이밍의 산악회 이름이 적혀있었다. 참 산악회스러운 이름이다 생각하면서도 그 당시에는 그 리본들이 나의 구세주인 것처럼 귀중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그 리본들이 아니었다면 벌써 으슥한 능선으로 튕겨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리본을 따라가길 한참이나 지났을까. 이번엔 또 다른 난관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발밑이 미끄덩하더니 갑자기 쭈욱 하고 내 발을 아래로 잡아 끄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이번에는 늪지대였다. 등산화가 통째로 빠져들어갈 만큼 질퍽한 진흙탕길이 정상으로 향하는 나의 발목을 잡아끌었다. 푹푹 꺼지는 발걸음을 가까스로 끌어올리며 걷다 보니 체력이 평소보다 몇 곱절은 더 깎여나가는 기분이었다. 이건 뭐 유격훈련도 아니고 등산하러 왔다가 군사훈련에 강제 동원된 기분이라 뭐라 표현하기 힘든 황당함이 몰려왔다. 이미 등산화는 진흙과 물아일체 된 상태라 만신창이가 되어버렸고. 이제 나도 더는 잃을 게 없었다. 이대로 못 먹어도 고. 무조건 정상 찍고 온다고 마음을 굳게 먹으니 더 이상 두려울 것도 없었다. 등산 세 시간째. 나는 어쩌다 명절 아침에 여길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가 싶은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그 정도의 나약한 잡념으로는 나의 등산 의지를 꺾을 순 없으리라. 그 당시의 나는 그만큼 등산에 미쳐있었다. 대단한 집념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늪지대에서 등산화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정상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멈추지 않은 채였다.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등산화가 진흙투성이가 되어서 마음은 좀 쓰라렸지만 뭐 어쩌겠는가. 천성산 정상 정복을 위한 고귀한 희생으로 받아들여야지. 나의 탱크 같은 등산화가 아니었다면 감히 정상까지 향하지도 못하고 중도하산하는 운명이지 않았을까. 고마운 나의 등산 파트너인 등산화를 칭찬하다 보니 드디어 정상 능선이 눈앞에 드러났다. 능선 위로 올라오니 드넓은 들판 같은 평지가 눈에 들어왔다. 가을이면 억새로 장관을 이룬다는 그 정상이었다. 지금은 계절이 맞지 않아 볼 수 없는 풍경이었지만 그 너른 평지를 보니 가을이면 펼쳐질 그 장관을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음이었다. 푹푹 빠지는 늪지대를 빠져나와 평지를 걸으니 드디어 살 것 같은 해방감에 젖어들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게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겪었던 온갖 고생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볼 수 없어 아쉬운 풍경을 뒤로하고 정상석으로 향하는 찰나,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표지판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내 눈에 들어온 건 철조망 앞에 허름하게 놓인 표지판이었다. 풀숲을 헤치고 가까이 다가가서 표지판을 본 순간,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고 묘골이 송연해지는 게 이러다 황천길 가는 건가 싶은 공포가 몰려왔다.
과거지뢰지대
지뢰라니... 지뢰라는 뉴스에서나 볼법한 단어를 지금 눈앞에서 보게 될 줄이야. 붉은색 배경과 귀신같은 궁서체의 다소 광기 어린 비주얼을 뽐내는 과거지뢰지대 표지판은 마치 경비공동구역 jsa에서나 볼법한 낡아빠진 철판 같았다. 녹슬고 낡은 그 표지판은 철망과 풀숲의 비주얼이 어우러져 으스스함과 스산함을 더했다. 순간 내가 등산하러 온 건지 비무장지대에 온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래 정신 바짝 차리자. 송전탑도 거쳤고 늪지대도 지나왔는데 지뢰 따위가 문제겠는가. 사실 문제가 되려면 지뢰가 가장 문제긴 하겠지만. 뭐 어쨌든 지뢰는 안 밟았고 이제는 정상 탈환만이 남았다. 저 멀리서 정상석이 나를 부르는 듯했다. 이제 정말 거의 다 왔다!
드디어 천성산 정상석에 당도하고 보니 어느새 시간이 꽤나 흘러서 어둑해지려는 낌새가 느껴졌다. 얼른 정상석 인증 사진을 찍고 하산하려는데 저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정상에 오는 동안 개미 한 마리도 마주치지 못한지라 사람이 그리워질 지경이었는데 드디어 정상에서 인기척을 느낀 것이다.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을 보니 등산복을 갖춰 입은 내 또래로 보이는 등산객이었다. 그 순간 초면이지만 반가운 마음에 하이파이브를 날릴 뻔했지만 등산하다가 미쳐버린 사람으로 보이면 안 될 테니 꾹 참았다. 마침 혼자서 셀카사진만 잔뜩 찍고 있던 터라 그 등산객에게 다가가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하고 나도 사진을 찍어드린 다음 서둘러 하산하기 시작했다.
그래, 정상 찍은 것까진 좋았는데 이제 마지막 난관이 나를 덮쳐왔다. 그것은 바로 깜깜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려가는 길은 임도길이라 무난한 길이였지만 어두워진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조급한 마음에 후다닥 내리막길을 내려가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빵빵거리는 경적소리가 울려 퍼졌다. 뒤돌아보니 자동차 창문 너머로 아까 정상에서 마주쳤던 그 등산객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깜깜해지는데 제가 태워드릴게요~'
기대하지 않았던 등산객의 호의에 망설일 틈도 없이 냉큼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차 조수석에 올라탔다.
'아휴~ 태워주셔서 감사해요~ 이렇게 갑자기 어두워질 줄 몰랐네요~ 선생님 아니었으면 막막할 뻔했어요 ㅎㅎ 하산지점까지만 좀 부탁드릴게요~'
산을 내려오면서 그 등산객과는 초면인 것 치고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사람도 나와 비슷한 시기에 등산을 시작한 등산 초보였고 내일 아침에는 금정산에 갈 계획이라는 얘기를 하며 혹시 생각 있으면 같이 가자는 말까지 덧붙였다. 등산에 미친 나에게는 굉장히 솔깃한 제안이었다. 생각 있으면 연락 달라며 연락처를 교환했고 우리 집 근처까지 데리러 오겠다는 친절을 베푸는 그 등산객. 역시 등산객끼리는 돈독한 전우애가 생기는 건지 등산이야기로 한참을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어느새 하산길에 다다랐고 그분은 그 이상의 친절을 베풀어 집 가까운 곳까지 날 데려다주었다. 그 등산객이 아니었다면 멧돼지와 하룻밤을 보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연한 만남이 있어 집까지 무사 귀환한 기나긴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