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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스테라 Feb 28. 2022

태도

국선변호인들은 피고인으로부터 돈을 받지 않고 변론한다.

돈을 받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변호인으로서 충실한 변론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가끔 그 정도를 넘어

‘과도한 애정’이 생기는 사건이나 소위 ‘꽂히는 사건’이 생긴다.    


상대방으로부터 이득을 얻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생기는 각별한 애정.

또는 상담 한번 했을 뿐인데도 단전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화.   

 


나는 다른 국선전담 변호사님이 담당 변호인인 사건의 국민참여재판을 보조한 적이 있었다.

그 변호사님은 피고인이 너무 억울해 보이지만 일반 재판을 받으면 유죄가 나올 것 같은 사안이라서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한 것이었다.


그 사건 재판을 위해 담당 변호사님이 다른 변호사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자료를 찾고, 여러 날 밤이 늦도록 재판 준비를 하셨다.     


젊은 남자 피고인이었는데 전과가 없었고 사건 자체는 정말 억울해 보였다. 그러나 유죄가 선고되면 구속은 자명한 일이었다.


어느 날 나는 그 변호사님이 재판 준비를 하며 애를 쓰는 모습을 지켜보다 그 변호사님께 말했다.


이제 그 피고인은 살겠네요.


실제로 국민참여재판에서 그 피고인에 대해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억울했지만 돈이 없어서 사선 변호인을 선임하지 못했던 그 피고인은 희망 없이 국선변호인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변호인과 피고인이 만난 날, 변호인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피고인이 가진 무언가를 본다.    

 

변호인이 그 사람이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내 가족 일처럼 최선을 다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그 사람의 ‘헤아릴 수 없는 운명의 움직임’이 좋은 방향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운의 그런 변곡점은 어떻게 오게 되는 것일까. 국선변호인은 대가를 받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오로지 그 사람이 가진 것에서 온다. 과거와 현재 ‘삶과 사람에 대한 태도’.    


만약 그 사람이 악행을 저지른 전과가 수두룩하고, 자신의 처신에 대해서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거나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인다면 변호인이 이 사람을 위해서 평소의 최선을 넘어 일을 할 마음이 들까.


분명 기록에 나타난 지난 삶과 그 변호사님과 만날 때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성품과 태도, 마음가짐이 그 사람의 운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난 6년간 국선전담 변호사로 약 1,700건의 형사사건을 변론했다.

그 많은 사건 중에 내가 피고인과 신뢰관계가 파괴되었다는 이유로 사임 신청을 한 것은 단 한건이었다.


나에게 항의를 하거나 불만을 표시하거나 공격적이거나 예민한 것은 사건 자체에 대한 불안감이나 억울함일 수도 있고, 법이나 재판절차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일 수도 있고, 정신질환 때문일 수도 있고, 나의 변론에 불만족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의 마음도 달래가면서 잘 지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만난 지 5분도 되지 않아 사임을 결정했다.    


그는 명문대 법대를 나오고 요식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주변 경쟁 식당 앞에 허위 내용의 플래카드를 붙여 명예를 훼손하거나 집요한 방식으로 영업을 방해했다. 유사한 전과가 많았지만 오로지 자신의 말이 다 맞고 다른 사람은 잘못됐다는 식이었다. 혼자 정의로운 스타일.    


그가 내 방에 들어오는데 나는 알 수 없는 거부감이 들었다.

머리에 참기름을 바른 것인지 올백으로 뺀들 뺀들 하게 올리고 일수가방 같은 것을 끼고 건들건들 들어왔다.


내가 정중하게 인사했으나 받지 않고는 내 방 의자를 불결하다는 듯이 툭툭 털더니 입으로도 훅 불고는 다리를 꼬고 거만하게 앉았다. 그리고 휴대폰을 여러 개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녹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말하는 내내 법은 자신이 더 잘 안다는 식이었고 나에게 취조하듯 물었다.


“유죄의 근거는.”


“이 기록 전체 다요.”,

“선생님 자체가 증거입니다.”라고 말할 뻔.

   

그에게 차분히 내가 불리하다고 생각하는 자료들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는 거만하게 히죽거리며 치..라고 했다.

그러다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내가 자신의 말에 동의해 주지 않으면 다시 비웃듯이 치..라고 했다.

나는 잠시 침묵을 지키며 생각했다.    


억울하다고 하는 것을 보니 증인신문도 해야겠고 한 두 번 만나서 될 것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저 참기름 머리 고객을 견딜 수 있을 것인가. 능력 없는 국선변호인이라는 인상을 주더라도 이제 이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 더 나을까. 그도 이런 마음의 나 말고 다른 변호인을 만나야 충실한 조력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손가락으로 내 기록을 가리키며 지적질을 하고 있는 그에게

국선변호인 선정 취소 신청을 하겠다고 했다. 다른 변호사님과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그는 자기가 많은 변호사를 만나보았지만 나 같은 황당한 변호사는 처음 본다면서 뭐 이런 변호사가 다 있냐고 소리쳤다.    

사실 나도 내가 황당했다.


그가 나간 후 내 마음이 정리가 되고 나니 나 자신의 행동이 좀 부끄럽고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 보다 더 예민하고 요구사항이 많은 피고인들이나 국선이라고 대놓고 무시하는 피고인들과도 잘 지냈는데 대체 그에게는 왜 그랬을까.    


나는 그가 오기 전 선의로 무장하고 그의 편에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내 방에 들어오는 순간 생긴 것이 아니라 살아오면서 만들어지고 쌓인 것이겠지.    


최근에

내가 피해자와 합의하기 위해 긴 통화를 하며 사과하고 조아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피고인이 전화를 끊자 울면서 말했다.


가진 게 없어서
자식들도 힘들게 하고 다른 사람한테도 폐 끼치고 변호사님도 고생시키네요.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선생님이 왜 가진 것이 없어요.
제가 모든 피고인을 위해 피해자로부터 이 정도로 심한 욕을 들어가면서 합의해주지는 않아요.       


사람의 인생에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에도 '질량 보존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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