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몬스테라 Aug 02. 2023

맛있는 말, 맛있는 대화

(말만으로도 따뜻해질 수 있어요.)

나는 동네의 작은 목욕탕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동네의 오래되고 작은 목욕탕은 늘 비슷한 모습이라서 안정감을 준다.   

  

분홍색 부항을 어깨나 등에 붙이고 있는 사람, 배 위에 방수비닐을 두르고 있는 사람, 1인용 방수 방석, 물 빠짐 망사 목욕바구니,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 얼음을 가득 채워 마시는 음료수..     


동네 목욕탕에는 특별한 음료수 메뉴가 있는데 바로 ‘박사’이다. ‘박카스 + 사이다’인데 나는 아직 마셔보지 못했다. 커피는 인스턴트커피가루를 녹여서 아메리카노를 만드는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메뉴 이름은 ‘원두커피’이다.     


작은 동네 목욕탕은 특별히 조용한 날이 있는데, 평일 중 매점이 쉬는 날이다. 그리고 주말 중에는 일요일 오전에 교회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나마 덜 붐빈다.     


탈의실 내 평상에서는 옷을 입고 앉아 텔레비전을 보시는 분들이 있다. 목욕탕 텔레비전에는 막장 드라마가 자주 방송되는데, 초면인데도 특정장면에서는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욕을 하며 보기도 한다.     

 

아침에 일찍 가면 아침드라마를 하는데 악녀들이 구속되었다가 출소하는 곳은 실제 구치소가 아니라 항상 ‘서대문형무소’이다.


누군가가 엿듣거나 훔쳐보지 않으면 전개가 되지 않는 비슷한 구조의 드라마들이지만 목욕탕에서 멍 때리고 잠깐씩 보는 드라마는 재미있다.     



몇 년 전의 일이다.


사무실 근처에 동네 목욕탕이 있었는데, 작은 찜질방을 갖춘 목욕탕이었다. 나는 그날따라 몸이 많이 피곤해서 점심시간에 잠시 찜질방 안에 있는 한증막에 가서 누워있었다. 한증막은 좁았는데 나는 구석에 누워서 벽을 보고 뒤돌아 있었다.


내 등 뒤로 아주머니들이 차례로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마치 나를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내 등뒤에 쭈욱 앉았다.     


그 아주머니들은 한 동네에 살면서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 그중 한 아주머니가 모시떡을 들고 왔으니 다들 있다가 함께 먹자는 말을 꺼냈다.     


그러자 다른 아주머니가 모시절편이냐고 물었다. 그분들은 모시송편, 모시절편, 모시개떡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모시는 모시풀 잎을 재료로 하는 떡인데, 모시옷을 만들 때의 그 모시풀이라고 한다. 나는 누워서 ‘아.. 옷의 원료가 되는 풀로 떡을 만드는구나..’ 하며 듣고 있었다.      


그분들은 자신이 가진 모시에 대한 모든 상식을 썰로 풀기 시작했다. 모시떡은 쑥떡과 다르게 다 자란 모시를 데쳐 쓰기 때문에 맛이 진하다든가, 원래 모시는 식용이 아닌데 예전에 먹을 것이 없을 때 모시개떡 같은 것을 만들어 먹으면서 먹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아.. 그렇구나..’하면서 듣고 있었다.


그분들은 모시떡을 만드는 자신의 방법을 얘기했는데 결과적으로 모시떡은 그냥 모시만 들어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다음에는 모시로 만드는 부각도 맛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모시가 혈관에 좋다더라, 뼈건강에 좋다더라는 얘기를 하자 나는 솔깃해졌다.

‘떡을 사 먹을 일이 있으면 모시떡을 먹어봐야겠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모시옷 얘기를 했다. 한산모시는 삼베보다 더 짜임새가 곱고 비단 같은 광택이 있어서 고급으로 쳤다는 것이다. 지금도 한산모시는 비싸다며.. 그러자 누군가가 모시풀이 초록색인데 어째서 모시옷은 흰색이냐고 물었다.     


나는 ‘어.. 그러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고향이 충남 서천이고, 모시를 만드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실을 만들어 베를 짠 다음에 표백하고 물에 적시고 말리기를 반복하면 흰모시가 된다고 했다. 서천에 있는 한산이 모시로 유명해서 서천에서는 모시축제도 한다고 했다.     


나는

그럼 모시랑 삼베는 어떤 차이가 있지? 하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 물을 뻔했다.


모시가 삼베인 줄 알았고 그게 그건 줄 알았는데 완전히 다르구나.. 나는 점점 아주머니들의 이야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 순간 누가 시댁이 안동인데 어르신들이' 대마'로 삼베인 안동포를 짰다고 했다.      


나는 ‘대마? 마약 그 대마?’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럼 삼베를 만들기 위해서는 대마를 재배한다는 말인가? 합법적으로?     


아주머니들은 옛날 어르신들이 삼베나 모시 한필을 짜려면 몇 달씩 고생해야 하는데 그래도 한필씩 짜서 밥 먹고 살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모시나 삼베 짜기가 얼마나 고달픈 작업인지를 서로 얘기하면서 모시풀을 이로 째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이가 벌어지고 안 좋아지게 되는데 여기서 ‘이골이 난다.’는 말이 나왔다고 하지 않냐고 했다.    

 

'아.. 이골이 난다는 말이 거기서 유래되었구나...'


어떤 아주머니가 나가고 나면 다른 아주머니가 들어와서 얘기를 듣다가 자기 상식 썰을 푸셨는데, 모시랑 삼베가 너무 비싸서 윤년에 수의를 미리 지으려고 해도 부담스럽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다가 모시랑 삼베만큼 시원하면서도 더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인견' 얘기가 나왔다.     


인견은 풍기인견이 제일 좋다며, 동네 어디에 풍기인견 이불을 파는 곳이 있는데 거기서 산 이불이 시원하고 좋더라는 말을 했다.     


나는 뒤돌아서 자는듯했지만 내 귀는 거의 기지국 안테나처럼 아주머니들의 이야기를 흡수하고 있었다. 중간중간 벌떡 일어나서 “정말요?”라고 하거나 질문을 할뻔한 충동을 누르고 그 한증막에 원래 부착되어 있었던 시설처럼 누워 있었다.    

 

나도 인견 이불 적당히 무게감도 있고 시원한 거 사고 싶었는데. 아주머니가 금방 일어나셨다.     


‘그러니까 그 이불집 상호가 어떻게 되냐고요... 그건 알려주고 가셔야죠..ㅜㅜ’     


아주머니들이 모시떡을 먹으러 우르르 나가자 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리고 마음이 좋았다.     


어떻게 모시라는 소재 하나로 저렇게 길게 오래 말할 수 있을까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중년 여성이 가진 삶의 지혜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어떤 말, 어떤 대화들은 그 자체로 참 맛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50대 60대 아주머니들의 대화를 듣다 보면 일상과 건강, 살림, 인생의 꿀정보들을 얻을 때가 있다.


가족의 안전을 위해 안전지향적인 삶을 추구했던 주부들은 과학적 증거가 없어도 알 수 있는 통찰력 같은 것이 있다.     


삶의 지혜를 가진 현자들은

주로 주말에는 아웃도어 복장으로

등에 붙는 배낭을 메고 다니는데,

그 배낭 안에는 떡이 들어있을 가능성이

 거의 100프로다.    

                                                             


작가의 이전글 출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