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동네 목욕탕에 다녀왔다.
어릴 때 나는 매주 주말마다 엄마와 여동생이랑 목욕탕에 갔고, 남동생은 아빠와 목욕탕에 갔다. 아빠는 목욕을 마치고 집에 올 때 늘 파인애플맛 쿨피스를 한통 들고 오셨는데, 나는 목욕을 마칠 때면 늘 아빠가 들고 오실 쿨피스를 기다렸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목욕탕 가는 것을 즐겼는데, 국선 변호사가 되기 전 사선 때는 가끔 출근 전 사무실 근처 목욕탕에 들르기도 했다.
출근 전에 목욕탕에 가면 씻고 나올 무렵 아침 드라마가 나왔다. 몸을 닦으면서 TV를 멍하니 보자 김청 배우님이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두부를 먹는 장면이 나왔었다. 아침 드라마는 볼 때마다 자극적인 장면이 나오는 것 같다.
여담이지만, 보통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출소 장면은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촬영하는데, 서대문형무소는 과거 독립투사들이 옥고를 겪었던 아픔이 있는 곳으로써 1987년부터 수용시설로 운영하지 않는다. 지금은 역사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출소 후 두부를 먹는 모습은 지금은 거의 볼 수가 없다. 과거에 출소 시 두부를 먹였던 이유는 두부의 흰색이 깨끗함과 새 출발이 상징이라고 여겨 다시 들어가지 말라는 뜻에서 먹이기도 했고, 수용시설에서 영양섭취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보충시키기 위해 단백질을 먹이는 취지도 있다고 했다. 지금은 안에서도 밥을 잘 주니까 출소 후 치킨이나 삼겹살 먹겠지.
출근 전 들르곤 했던 목욕탕에서 당혹스러운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목욕을 하다가 어떤 아주머니께서 쓰러지신 것이다. 119 구급대원들이 그렇게 신속하게 도착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방송으로 구급대원들이 탕 내로 들어오니 모두 가릴 것 가리라는 취지의 방송이 나왔다. 일단 아픈 사람 구하는 게 먼저니까 나는 주섬주섬 수건으로 가리고 뒤돌아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실 한오라기 안 걸친 상태로 씻는 아주머니들이 있었다. '보는 사람 눈이 썩지 내 눈이 썩나.' 이런 마음이었을까.
내가 주말에 다녀온 우리 동네 목욕탕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남탕에 '생활의 달인'에 나오는 목욕관리사님이 계신 곳이다. 그 세신의 달인께서 목욕탕을 인수하여 이제 목욕탕의 사장님이 되셨다고 한다. 우리 동네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목욕탕에 가면 나의 루틴이 있다. 들어갈 때는 늘 냉커피를 주문해서 들고 들어가고, 나왔을 때는 바나나맛 우유를 먹는 것이다. 목욕탕에는 특이한 메뉴가 많다. 박카스와 사이다를 섞어서 먹는 것을 '박사'라고 하고 박카스와 포카리스웨이트를 섞은 것을 '박포'라고 하는 등.
내가 다니는 목욕탕에는 여탕에 작은 '정통 소금방'이라는 찜질방이 있는데, 그곳에 들어가려면 목욕탕 입구에서 찜질복 값도 같이 결제해야 한다. 그곳은 여탕에 존재하여 여자만 들어갈 수 있다 하더라도 탈의한 채 들어갈 수는 없다.
그런데 동네 목욕탕에는 나름 기득권 세력이 존재한다. 바로 '달 목욕'을 끊는 사람들인데 월 단위로 목욕비를 계산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예 목욕바구니를 목욕탕에 보관하고 매일 같이 목욕탕에 온다. 그들은 목욕탕의 룰을 잘 지키지 않는 경향이 있다. 정통 소금방에서 상탈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 '달 목욕'을 끊은 사람들이다. 누구 한 명이 들어오면 언니 언니 하면서 자기들끼리는 다 아는 사람들 같다.
룰을 지키지 않는 것을 불편하지만, 그들은 목욕탕에 다니면서 절친해진 관계로 정통 소금방 안에서 별의별 얘기를 다 하는데, 음식과 건강기능식품, 좋은 이불을 어디서 사는지, 피부과 이벤트에 연예인 x파일, 최근 부동산 동향에 맛집 리스트까지 얻을 수 있다. 나는 찜질방에서 웅크리고 수건을 머리에 씌운 채 가만히 있지만 사실 그들의 얘기에 초집중하고 있었다.
"아들을 군대에 보냈더니 집으로 자꾸 택배가 와."
"어머 언니 아들 효자다. 아들이 월급 받아서 엄마한테 뭘 또 사 보내나 보지?"
"아니. 지가 제대하고 게임하려고 장비를 미리 집에 보내놓는 거야."
듣다 보면 소소하게 재미있다.
정통 소금방에서 나와 탕 내로 진입하면 매의 눈으로 샤워기 앞에 자리가 있는지를 살핀다. 목욕바구니나 목욕방석, 혹은 대야의 때수건이 있다는 것은 '점유의 의사표시'이다. 그 표식이 없는 자리를 스캔한 다음 나도 나름대로 점유의 의사를 표시하는 작업을 한 다음에야 자리를 뜬다.
가끔 목욕관리사에게 세신을 맡기기도 하지만, 어제는 스스로 씻으니 세신비용이 나가지 않아서 '몸테크'한 기분도 들고 좋았다.
다 씻고 나와 옷을 입고는 루틴대로 바나나맛 우유를 사서 평상에 앉아 먹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매점 아주머니와 바닥 청소 하시는 아주머니가 큰 소리로 싸우기 시작했다.
서로 자기 입장을 내세우며 거친 말로 싸우기 시작하는데 은근히 도파민이 솟았다. 다투거나 다투는 것을 보는 것도 싫어하는 편인데, 어제의 그 싸움은 마치 무료한 삶에 한줄기 빛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바나나맛 우유를 내려놓고 그 싸움을 직관하며 둘 중 누가 옳은지 마음속으로 판결을 내리기로 했다. 일단 사건 내용을 분석하니 싸움의 발단은 이렇다.
원래 여탕에서는 목욕탕 입장 시 결제하면 수건 두장을 주는데 어떤 사람들은 수건이 부족해서 '청소 언니'에게 수건을 한 장 더 달라고 부탁을 하곤 한다. 세탁된 수건을 개는 작업도 청소 언니가 하기 때문에 청소 언니는 많은 수건을 지배하고 있다. 청소 언니는 누군가 수건을 더 달라고 하면 한 장씩 더 주곤 했다.
그런데 '매점 언니' 입장에서는 목욕탕 룰이 인당 수건 2장이고, 수건을 더 주면 누구는 더 많이 쓰고 누구는 덜 쓰는 형평에 어긋나는 문제도 있는 데다 수건을 몰래 가져가는 사람도 있어서 입구에서 계산할 때 주는 수건 외에는 절대 내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청소 언니는 고객이 필요하다는데 그럼 안 주냐 하는 입장이었고, 매점 언니는 그러면 목욕탕 운영의 관점에서는 손해가 아니냐는 입장이었다. 한 사람은 고객만족을 위해, 한 사람은 목욕탕 손해 방지를 위해. 둘 다 나름 동기는 긍정적이었다.
그런데 싸움은 늘 지난 얘기를 끄집어 오면서 확전 된다.
"너는 처음부터 목욕탕 생각보다는 네 체면 세우는 게 먼저였어."
"언니는 다들 그래. 이기적이라고."
둘 다 발끈해서 청소 언니는 바닥의 물을 닦던 밀대를 탁 던지고, 매점 언니는 행주를 탁 내려놓고 몸싸움도 불사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서로에게 가까이 갔다. 머리끄덩이 잡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때 그들 모두와 친한 '달 목욕' 아주머니들이 달려들어서 둘을 떼어놓고 둘이 이러면 안 된다 어쩌고 하면서 달래기 시작했다. 결국 육탄전은 일어나지 않았고 서로 뒤끝 있는 안 예쁜 말을 몇 번 주고받으며 끝냈다.
둘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누가 옳은지 판결을 내리기는 어려웠지만, 손님의 입장에서는 넉넉한 인심의 청소 언니 편을 들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