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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스테라 Aug 06. 2022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


  1998년 12월, 대학 4학년 말에 졸업하기 전 중소기업에 조기 취업이 되었다. 취업난에 어찌 바로 취업이 되었느냐며 남들은 부러워했지만 사실 원하던 일은 아니었다. 여러 시험에 응시했다가 고배를 마셨기 때문이었다.      

  나는 군인이, 경찰이, 군무원이 되고 싶었다. 준비했던 시험을 앞두고 백과사전처럼 두꺼운 시험 대비서를 공부했지만, 연애와 학업과 취업 준비를 병행하느라 힘에 부쳤던 젊은 시절이었다. 


  IMF 이후, 그때까지 그다지 관심을 받지 못했던 직종에 내로라하는 대학 출신들이 대거 지원했다는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그 영향인 듯했다. 불안정한 시기의 젊은이들이 안정적인 직장을 선호하게 된 결과일 터였다. 그 자리에 내가 낄 틈은 없었다.     

  그나마 학과 성적은 꽤 봐 줄만 했는지 교수님 추천을 통해 취업처가 알선되었다. 동문 선배가 근무하고 있는 곳이니 잘 적응할 수 있을 거라는 교수님의 격려와 친구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첫 출근을 했다.     

  고향을 떠나 경기도 낯선 곳, 길도 모르고 분위기에 적응도 되지 않아 오랫동안 마음을 잡지 못하고 헤매었다. 외롭고 무섭고 도망가고 싶은 나날들이었다. 친절한 것 같다가도 뒤통수를 치거나,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직장의 삭막함을 깨달으며 적응하는데 버거워했다.     

  그럼에도 시간은 흘러 직장 내에서 내 생각을 주장하기도 하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는 날이 왔다. ‘니들이 날 무시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해봐. 내가 밟히나.’ 하는 마음이 생겨나 독기와 오기로 무장하며 하루하루를 지냈다.     

  직장 생활을 하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우리 부서의 전무이사의 행태였다. 그는 결벽증이 있는 사람으로 자기 기준대로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 자신의 물건이 제자리에 있는 것, 주변의 청결 상태에 극도로 집착하는 사람이었다.      

당시 여직원이라 함은 남직원과는 달리 온갖 잡일을 하는 사람 정도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에 나는 그의 책상과 주변 쓸고 닦기를 수시로 했었다.      

  함께 입사한 남직원들은 해외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해외 출장도 가고 자신의 일을 맡아하며 승승장구하는 듯 보였다. 보다 생산적인 일, 보다 눈에 띄고 성과를 낼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던 소망과는 달리, 나는 직원들의 출장비 정산, 서류 정리, 탕비실 정리, 손님 접대 후 커피잔 닦는 허드레로 일상을 채우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월차를 내어 고향에 내려왔던 어느 날.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기를 통해 불같이 역정내는 소리가 옆에 계시는 부모님에게도 전해졌다.

  “내 커피잔 어디 있어? 당장 와서 찾아내.”

그의 용무는 자신의 커피잔을 찾는 일이었다. 전화를 받는 나를 보며 부모님은 직장상사에게 미움을 받을까 안절부절 걱정을 하셨고, 소중한 월차였음에도 그의 커피잔을 찾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기차를 탔다.     

  기차를 타고 올라가는 자신이 서럽고 억울하고 분했다. 그리고 그를 저주했다.     

  사무실에 가보니 어느 개념 없는 직원이 이사실에 고이 정리되어 있던 그의 커피잔을 사용하여 커피를 타 마셨고, 사무실 구석에 처박아 놓고 출장을 나가버린 상태였다. 굳이 이사실까지 들어가서 그놈의 커피잔을 사용한 저의는 무엇이며, 그깟 커피잔 때문에 간만의 휴가를 보내고 있는 직원을 불러들이는 또라이 이사놈은 또 무슨 심보인가.     

  속으로 온갖 저주와 욕설을 퍼붓고 이놈의 회사 때려치우겠다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쉬지 못하고 올라온 것도 화가 났지만, 전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를 듣고 안절부절했던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라 더 악에 받쳤다.     

  그렇게 분노에 찬 2년 여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유년 시절 옆집에 살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근 10년 만의 전화였다. 우리 사이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끼어들었는지는 체감하지 못한 채 어제 만나 헤어진 것 같은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 친구는 사범대를 나와 교사가 되기 위해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부러워하며 이야기했다.

  “좋겠다. 넌 꿈을 향해 노력하고 있구나. 난 이놈의 회사에 짱 박혀서 미래도 없고 재미도 없다.”


  내 이야기를 듣더니 친구가 말했다.

  “넌 꿈이 뭐였는데?”

  “나? 어릴 적 내 꿈도 선생님이었지.”

  “그럼 너도 하면 되잖아.”     

  충격이었다. 나도 꿈이 있었다는 것, 앞으로의 꿈에 대해 생각해보지도 않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꿈을 향해 노력하지 않고 푸념만 늘어놓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후 온갖 정보를 수집하여 교사가 되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4년제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에 학사 편입이라는 제도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가능한 대학과 희망하는 학과를 추렸다.     

  편입 합격 여부를 모르는 상태로 과감히 사표를 내고 고향에 내려왔다. 설사 합격 되지 않더라도 공무원 시험 준비라도 해보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고향에 내려온 당일 대학으로부터 통보를 받았다. “유지현님 합격입니다!”     

  그렇게 내 인생에 적극적인 개입과 함께 새로운 세계에 한 발을 내딛게 되었다. 이 악물고 미워했던 전무이사 덕에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런 게 아이러니한 인생 법칙 아닐까?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 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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