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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스테라 Aug 06. 2022

일본에서 일주일 모자란 한 달 살기

기다리고 기다리던 연수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필 이런 중요한 시기에 남편은 나보다 일주일 먼저 하와이로 출장을 가버렸다. 나의 일정과 겹치는 데도 일말의 망설임이 없던 남편을 보면서 먼저 계획이 잡혀있었던 내가 오히려 망설였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아니 질 수 없었다. 그냥 밀고 나가자. 나도 내 맘대로 하고 싶은 거 할거야.     

연수 가기 전 일본은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까다로운 절차를 요구했다. 연수원에서 요구하는 백신증명서는 한국과 양식이 아주 달라서 한국에 있는 병원들은 일본 양식으로 해줄 수 없다며 다섯군데에서 퇴짜를 놓았다. 마지막으로 줄곧 다녀오던 병원을 찾아가 사정을 했다. ‘제발 부탁드려요. 저 다섯군데에서나 퇴짜맞았어요. 원장님이 안해주시면 저 진짜 연수 못가요.’. 동정표가 통했는지 원장님이 도장을 찍어주셨다.     

그것도 모자라 갑자기 하네다 공항의 항공편이 모두 취소된다는 통보를 받았고, 며칠 후 다시 몇 대는 그대로 운항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백신 증명서를 떼어두고, 입국 72시간 이내의 PCR검사를 받고, 코로나 음성확인서 발급받고, 코로나 관련 앱 MYSOS를 설치하고 관련 자료들을 등록하고 안내하는 대로 체크, 또 체크... 나 일본 갈 수 있겠지?     

이럴 때 남편이 없으니 괜시리 초조했다. 불안하고 열받는 마음을 나눌 대상이 필요했는데 이미 가버리고 없는걸 어쩌겠어. 이번에야말로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고 준비하고 해결하는 온전한 나만의 시간이 되었다. 남편과 나 둘 다 집을 비울 10일간을 위해 청소하고 정리하고 먹을 것을 채우고 수건 한 장도 남겨두지 않고 빨래하고 쓰레기를 비우고 안전한 곳에 차를 주차해두는 것까지 신경써야 할 일 천지였다.     

아이들만 집에 남아있는 열흘의 시간이 무척 걱정되고 불안했다. 제때 일어나서 학교는 갈는지, 밥은 챙겨먹을 수 있을지, 빨래 못해서 냄새나는 옷 입고 학교가게 되는 건 아닌지, 고양이들에게 밥은 잘 챙겨줄는지... 생각할게 왜 이리 많은거야. 그동안 이렇게 많은 것들을 신경쓰고 살아왔던거야?     

하지만 사부작거리며 하나하나 처리하는 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설레임이라는 마약이 마치 나를 지배하는 듯이 알아서 움직이며 내내 히죽거렸다.     

출발하기 전날, 여느 때와 다름없는 척을 하고 싶었던 건지 새벽 1시까지 넷플릭스로 밀린 드라마를 봤다. 피곤해서 눈이 뻑뻑한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뒤척거리며 겨우 잠을 청하고 알람보다 먼저 일어나 다시 정리할 것이 없는지 둘러보고 고양이들 밥을 주고 떠날 짐을 확인했다. 하나도 놓쳐서는 안되니까!!!     

인간 자식 두 녀석과 고양이 자식 두마리와 작별인사를 하고 무거운 캐리어 2개를 끌고 배낭을 메고 나오는데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콜택시를 불러 처마 밑에서 기다렸다가 후다닥 택시에 올라탔다. 비를 맞아도 들뜬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기차역에 도착했고, ktx를 타고 서울역 도착. 공항철도를 타고 김포공항까지 순식간이었다.     

이내 비행기 탑승 수속을 마쳤다. 면세점을 둘러보는데 물욕이 없는 건지 물건이 없는 건지 사고 싶은게 하나도 없었다. 에이 관두자. 돈 안쓰고 좋지 뭐~~     

이렇게 일본에 도착했다. 10년 전에 연수원에 왔을 때와 너무도 변한 게 없었다. 추억 속에서만 거닐던 거리를, 공원을, 마트를, 시장을 돌아다니는 데 뭐랄까 오래 떠났다가 그리웠던 곳에 돌아온 느낌이랄까.     

도착한 첫날 수속 절차로 거의 하루를 다 보냈다. 너무 피곤했다. 아차!! 잊어버릴 뻔했네. <일본에 가면 하고 싶은 일>을 적어둔 종이를 꺼냈다. 

1일 1캔 알콜 마시기

출근하는 직장인들을 보며 아침 조깅하기

근처 커피숍 도장깨기

일본 서점에 들러 에세이 사서 읽기

한국에 없는 특이한 것 사기

여름 한정 호로요이(알콜음료) 사기

자전거로 숙소에서 최대한 멀리 가보기

일본 센토(공중목욕탕) 가기

일본에 있는 지인 만나기  

그림 그리기 & 글 쓰기      

하고 싶은 것들이 줄줄이 나왔다. 다시 읽어보니 참 소소하기 그지 없다. 여태 못해본 것들, 대신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여기에서 해보자. 리스트를 적으면서 결심한 마음을 존중하자. 희망 사항이겠지만 과연 나는 몇 개를 이루고 돌아갈 수 있을까? 이곳에서 나는 무엇을 깨닫고 얻어가게 될까.     

리스트를 실천하기 위해 늦었지만 근처 이자카야를 찾아갔다. 시원한 맥주를 주문했다.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잔을 들어 한숨에 들이켰다. 피곤한 상태에서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셔서일까? 발가락까지 빨개졌다. 조금 쑥쓰러웠다. 그 순간을 만끽한 뒤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흔들거리는 내 몸을 느끼며 해방감을 느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서 거리로 나갔다.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 검은 구두, 검은 가방을 맨 일본의 전형적인 직장인들이 바쁘게 출근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가로지르며 형광색 반바지를 입고 신나게 달렸다. ‘당신들은 일상을 살고 있지만 나에게는 지금이야말로 특별한 순간이다.’ 라는 듯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날씨가 오락가락했다. 장마는 지났다고 하는데 비가 엄청나게 내렸다. 이마저도 감사했다. 더운 일본에서 조금이나마 시원하게 지낼 수 있으니 이것도 행운의 하나이다. 비가 와도 굴하지 않고 우산을 쓰고 나가 내가 밟아보지 않은 곳에 나의 발자국을 남기려고 한다. 조금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조금은 더 큰 세상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서 만나게 될 또 다른 새로운 인연을 기다릴테니. 다른 건 차근차근 해내기로 하고, 지금은 당장 편의점에 알콜 음료 사냥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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