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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Jul 02. 2024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대하여

레비나스의 '유책성의 윤리학'과 얼굴 없는 공동체

https://youtu.be/CeDO5jFYpJc


1.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우리들에게 피할 수 없는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이 질문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이유는, 질문들이 우리가 정치적인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세심하게 고려했을 때는 대답할 수 없을 정도로 도발적으로, 또는 영화를 만든 사람의 의도가 질문에 대답하는 일을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데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 보자.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무엇일까?

아래 세 장면이라는 점에 대다수의 관객은 동의하지 않을까 한다.

두 장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부에서 식량을 전달하려고 하는 폴란드 출신의 어린 소녀가 독일군의 감시를 피해서 사과를 흙으로 된 언덕에 묻는 장면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부의 흙과 땅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리고 독일군의 경비가 얼마나 삼엄했는지 우리는 부분적으로밖에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소녀가 "사과를 땅과 언덕에 묻는 작업"이 빛이 없는 한밤중에 이뤄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열화상 카메라(thermographic camera)로 찍은 마치 네거티브 필름과 같은 흑과 백의 콘트라스트를 통해서만, 소녀가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부에서 한 일을 목격할 수 있고, 거기서 어떤 성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경외감을 느낀다. 비록 이 경외감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으며, 현실의 전쟁과 싸움을 넘어서고 있다는 느낌만을 받는다고 해도 말이다. 오직 신만이 그녀가 하는 일을 관찰하고 있다.

한 장면은 수용소장인 회스가 밤늦게 회색으로 된 무기질적인 계단을 내려오다가 뜬금없이 구토를 하는 장면이다. 왜 구토를 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관객의 입장에서 회스가 같은 건물 내부에서 건강검진을 받을 때 여러 차례 의사가 배를 눌렀고, 회스에게 뭔가 질병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구토하는 장면의 요점은 그게 아니다. 감독은 여기에서 절묘한 편집 기술로 2020년대의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그곳에 근무하는 관리자들에 의해 관리되는 모습을 현장 다큐멘터리처럼 보여 준다. 관리자들은 진공청소기를 가져와서 먼지를 깨끗하게 쓸고 닦는다. 왜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 장소임에도 먼지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가? 이 먼지는 유대인들이 죽은 재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는다. 관리자들은 죽은 유대인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는 아우슈비츠 '박물관'의 창문을 깨끗하게 닦는다. 이 시설은 폴란드 정부에 의해 관리되고 있으며, 오래 전부터 하나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서 보존되어 왔다. 그리고 이 '의지'는 또한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력한 군사력에 의해 영화 내부의 시간에 곧 도래할 신화적인 폭력이기도 하다.

회스의 구토는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의 말로, 타자의 얼굴(visage)을 외면하면서 타자를 섬멸한 자가 곧 맞이하게 될 신화적인 폭력과 교수형에 대한 '폭력의 예감'이기도 한 것이다.



2. 레비나스와 우치다 타츠루는 이렇게 말한다.


(우치다 타츠루,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pp. 267-272.)


그러한 의미에서 애무를 환기하는 '사랑받는 여자'는 '살인'의 욕망을 환기하는 '타자'와의 존재방식에 비교 추정할 수가 있다. '살인'은 스스로의 권능으로부터 달아나는 자에게 권능을 휘두르는 일이다. 우리는 자신을 지배하는 자에게 살의를 품지 않는다. 우리가 전면적인 말살을 원하는 것은 나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 즉 타자뿐이다.


내가 죽이고 싶은 것은 절대적으로 자립하고 있는 존재자, 나의 권력을 무한히 초월하고 있는 자, 그리고 그 때문에 나의 권력에 대항하는 일 없이 권력 그 자체를 마비시켜 버리는 자이다. '타자'야말로 죽이고 싶은 유일한 존재자이다. (TI, p.173)

살인은 '인류사상 가장 통속적인 사건' (TI, p.173)이다. 이 세계라는 틀 안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용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는 나에게 싸움을 걸 수 있다.' 다만 물리적 저항력에 의해서는 아니다. 그러한 저항력은 나와 '타자'를 포함하는 전체성 안에서만 작용한다. '타자'가 나에게 향하는 저항력은 '타자의 존재가 이러한 전체를 초월해 있다는 사실 그 자체', '초월의 무한' (TI, p.173)인 것이다.


'살인'과 '에로스'는 주체성의 위기적=생성적 국면이라는 점에서 구조적으로 강한 상동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앞의 인용 중에 '죽인다'를 '사랑한다'로 바꿔 놓으면, 그것은 그대로 레비나스의 에로스론으로 읽을 수 있다.


(중략)


'또 한 명의 타자'가 출현한 순간, 나의 면전에 있는 '타자'는 이제 더 이상 '둘도 없는 존재'가 아니게 된다. '타자'들은 나를 향해 각각 다른 모순되는 요청을 해올지도 모른다. 경우에 따라서는 '타자'들끼리 서로 반목하고, 서로 싸우고, 일방이 타방을 지배하고, 수탈하고, 박해하는 일도 있다. 그때에는 선택과 우선순위라는 문제가 생겨난다. (...) 우리는 '타자의 타자성을 사정한다'고 하는 배리적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때가 되어 비로소, 우리가 앞서 세계에 윤리를 가져오기 위해서 물리쳤던 '법리적 공정', '심판'이 요청되게 된다.


(중략)


'윤리적 질서, 사랑의 질서' 혹은 '종교적 차원'으로부터, '정의의 질서', '정치적 차원'으로의 이동을 요청하는 것은, '타자의 다수성'이라는 현실이다.


(중략)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법리적 공정'이 '희생자'나 '피박해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과 자비가 요청한 것이라는 것, '법리적 공정 (=정치)'을 요청한 것은 '인간적 공정 (=윤리)'이라는 것, 이 순서를 잊어서는 안 된다.


정의를 요구한 것은 사랑의 과잉이다.


그 윤리적 기원 때문에 제3자의 재판정에는 '역사의 재판정'과 같은 비인간적인 '철의 법칙성'이 관찰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분명히 객관적 법리의 이름으로 심판은 내려진다. 그러나 그때 재판관은 피고의 얼굴에서 눈을 돌리고 있다. 왜냐하면 피고의 얼굴을 보아버리면 --재판관과 피고가 단 둘이서만 서로 응시해버리면-- 준열하고 엄정한 심판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말기 때문이다.


성구는 '심판을 내리는 자는 개인의 얼굴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즉 심판인은 자신의 앞에 있는 인간을 보아서는 안 되며, 그 개인적 사정을 참작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심판인 쪽에서 보면 피고는 단지 고발에 책임을 져야 할 자일 뿐이다. (EL, p.143)


3. 과연 레비나스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영화관에서 보고 나서 어떤 감상을 남길까?


전혀 알 수 없다. 짐작할 수조차 없다는 게 내 결론이다. 그럼에도, 나는 레비나스가 이 훌륭한 영화에 대해서가 아니라, 작금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에 대해, 전쟁에서 벌어지고 있는 범죄와 잔혹함에 대해서는 무슨 평가를 할지는 짐작이 된다. 레비나스가 말하지 않은 것들을 우리는 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다. 레비나스는 탈무드의 1절에 등장하는 말, "계율 없는 유대인은 세계의 재앙이다"라는 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우치다 타츠루,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p. 260)


 > 토라[율법서]는 세계 내에서 가장 비정한 백성에게 주어졌다. 만일 유대의 백성이 토라를 부여받지 않았다면, 만일 토라를 잃어버렸다면, 세계의 어느 백성도 유대의 백성에게 맞서는 일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 유대의 백성은 마치 바위에 매달려 있는 나무와 같다. 대단한 생명력! 대단한 번식력! 그 때문에 유대 백성에게 토라가 주어진 것이다. 불꽃의 토라, 그것만이 이 세계를 침략하는 생명력을 위축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QTL, p. 178)


자신을 '세계의 재앙'이라고 깨닫는 것이 세계에 정의를 가져오는 기점이 된다. 자신을 다른 국민들과 같은 정도로 유해하고, 같은 정도로 범용한 '보통 국가'의 국민이다(혹은, 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가령 그 유책성의 사정(査定)이 객관적 기준에 비추어 타당했다고 하더라도-- 결코 세계에 정의를 가져오는 기점이 될 수 없다.


인간의 세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정의가, 심판의 장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유책성을 자기 홀로 인수하는 것이 가능한 누군가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QLT, p. 182)

4. 나치 독일인의 어리석음은 여러 겹으로 겹쳐져 있다. 그들이 저지른 어리석음은 심오하며, 단순하지 않다. 사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도 여러 겹으로 겹쳐져 있는 어리석음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개념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치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집단을 절멸시킨다는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을 철저하게 실행했고, 그 결과 강력한 신화적인 폭력을 맞아서 패망했다. 80년 뒤, 팔레스타인에게 무자비한 공격을 퍼붓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레비나스는 이렇게 말했을 것만 같다.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이제 타자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라고.


유대인들의 얼굴이 타자의 얼굴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박해받는 자의 입장에서 주체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무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박해자의 입장에 처해 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우리에게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기록하고 평가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우리의 대답을 듣기 전에 퇴장하기를 선택한다.




자신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많은 책무를 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비교의 절차 없이 '느닷없이de emblee' 선언하는 인간이 등장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선취된 윤리적인 '나'의 복수형, 스스로를 '만방의 백성들과는 다른 범위에 있는a part de tous les nations' 백성으로서 집단적으로 선언하는 '우리'를 레비나스는 다른 문맥에서 '이스라엘'이라 부른다.


  '이스라엘'이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오히려 도덕적 카테고리이다. (DL, p. 39)

(중략) 중요한 것은 '도덕적 카테고리로서의 이스라엘'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DL, p. 39) 그러한 '도덕적 카테고리로서의 이스라엘'이 있기 때문에, 바로 그래서 '역사상의 이스라엘'에 대해 '이스라엘은 충분히 이스라엘적인 것일까'라는 물음이 근원적인 비판으로서 유효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우치다 타츠루,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p. 259)




이스라엘 안에서 "다른 사람들보다도 많은 책무를 지고 있다고 하는", 그런 명백한 사실을 "느닷없이 선언하는 인간"이 등장하기를 기원한다. 비록 내 예상이 비관적이지만, 그러한 희망을 놓고 싶지는 않다.


참고문헌


우치다 타츠루,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이수정 옮김, 갈라파고스. (2013)

원서: 内田樹著『レヴィナスと愛の現象学』, 文春文庫, 2011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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