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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Jul 02. 2024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 "대공 트리오"를 듣고 나서

2022년 11월의 기록

https://youtu.be/LZ5bULkLzak


종종 클래식 음악을 경청하면서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경험하지만, 그 감정이 올바르게 정향 되어(orientated)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들이 있다. 즉슨, 클래식이 주는 감동은 작곡가가 그 곡을 쓸 때 느꼈던 여러 가지의 감정들, 기분과 느낌들, 이런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클래식 애청자는 감동의 원천을 이해할 수 없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건 클래식 음악이 하나의 완성된 세계이며 청자에게 이 세계를 받아들일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하철 화장실 등에서 들을 수 있는 파편화되어 들리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하나의 예시로 거론할 수 있을 것 같다)


말 그대로, 클래식은 종합 예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작품 안에는 작곡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세계의 전부가 밀도 높게 응축되어 들어가 있다. 예를 들어,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 그렇다. 두 작품의 가치는 개별적으로 분석하고 비교해서는 얻어질 수 없다. 그리고 슈베르트의 경우, 슈베르트가 그리고자 했던 아름다운 세계가 절실하게 표현되는 작품은 옥텟(작품번호 D. 803)과 피아노 트리오 2번(D. 929)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토벤의 작품 중에서 바흐와 슈베르트의 그것에 비견될 만한, 혹은, 베토벤 인생의 정수가 포함되어 있는 작품은 바로 대공 트리오일 것이다.


나는 베토벤의 "대공 트리오"를 재작년 11월에 산토리 홀에서 들었다. 도쿄의 아카사카 근처에 있는 산토리 홀은 음향의 측면에서 가장 뛰어난 홀 중의 하나로 거론할 수 있는데, 이 글의 주제는 음향이 아니기에 과감하게 생략하기로 한다. 재작년 11월에 산토리 홀에서 "대공 트리오"를 연주했던 음악가는 다음과 같다.

바이올린, 고토 미도리 (Midori Goto).

첼로, 앙트완 레델란 (Antoine Lederlin).

피아노, 조나단 비스.

당시 나는 친구와 함께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를 듣기 위해 산토리 홀에 갔다. 친구는 밤새 잠을 못 자서 매우 졸립다고 말했는데, 나는 그 말이 예언이 될 줄은 몰랐다. 친구는 졸면서 베토벤의 위대한 음악을 들었다. 그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상체를 앞으로 쭉 뻗어서 고토 미도리의 연주를 집중해서 들었다. 한 음 한 음, 비브라토 하나까지도 놓칠 수 없었다.


베토벤의 트리오 연주는 연주자를, 말하자면 일종의 궁지 속으로 몰아넣는다. 연주자는 악보를 따라가면서 충실하게 베토벤의 지시를 재현할 것을 암묵적으로 요구받는다. 그와 동시에 연주자는 다른 연주자가 표현하는 '음들'을 놓칠 수 없다.

내가 들었던 연주에서는 주로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 고토 미도리였다. 그녀의 바이올린은 거침없이 달려갔다. 누군가가 들판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첼로와 피아노는 바이올린의 거침없는 질주를 뒷받침했다. 특히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좋았다. 산토리 홀은 피아노의 음향을 둥글게 만들어서 관객들의 귀에 부드럽게 들리게끔 가공해 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만약 내가 객석이 아니라 트리오의 바로 앞에서 연주를 들었다면 전혀 다르게 들렸을 것이다. 내가 들었던 최고의 연주였고, 곡이 끝나고 난 뒤 그들은 몇 번의 박수를 받고 지친 표정으로 대기실로 들어갔다. 관례적으로 있는 앙코르 연주도 없었다. 나는 그것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눈에 보이는 세계(스탠리 카벨)가 실은 눈 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귀에 들리는 세계 역시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들리지 않는 부분까지 들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관객이 최대한 집중하지 않는다면 베토벤의 피아노 트리오는 당연히 아무것도 아닌 연주로 들릴 수 있다. 언제나 그럴 위험에 처해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라도 세 명의 연주자는 "대공 트리오"에 의한 시험을 받는다. 바이올리니스트인 고토 미도리와 이자벨 파우스트의 연주는 나에게 무한에 가까운 세계를 보여준다. 그들이 보여주는 세계를 올바르게 향유하기 위하여, 베토벤의 삶 전체를 온전하게 느끼기 위하여, 내가 지금까지 클래식과 함께 인생을 살아왔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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