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 판동초 ‘매점 기본소득’ 현장
학창시절을 돌아보면, 역시 학교 가는 재미는 수업보다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 혹은 ‘맛있는 급식’, ‘하굣길 떡볶이’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쉬는 시간이나 늦은 오후 매점으로 달려가 호빵이나 아이스크림으로 출출함을 달래던 재미도 빠질 수 없죠.
하지만 이런 소소한 재미를 모든 학생이 누릴 수 있던 건 아니었습니다. 용돈이 부족하거나 없는 경우 교문 앞 분식점의 500원짜리 컵떡볶이도 사치였으니까요. 어쩌면 이것은 학교 안에서 시작되는 가장 가볍지만 가장 빈번한 ‘불평등’의 경험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작다면 작고 하찮다면 하찮을지도 모를, 이런 고민에서 의미 있는 실험을 시작한 곳이 있습니다. 옥천군 안내면 오덕리를 지나면 금방인, 보은군 삼승면 판동초등학교(교장 이미애)입니다. 판동초는 10월말부터 전교생 41명에게, 일주일에 2천원을 매점화폐로 지급하는 ‘매점 기본소득’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판동초는 어린이들이 학교 안에서 경험하는 ‘격차’를 인지하면서 이 같은 매점 기본소득을 실시하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매점 기본소득 시행 두 달여. 판동초등학교의 학생들은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됐을까요? 그리고 판동초등학교는 매점 기본소득을 통해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을까요? 판동초등학교 매점 기본소득 현장을 찾아봤습니다.
판동초의 매점 기본소득이 실시되는 현장은, 지난해 9월 문을 연 매점 ‘빛들마루’다. 도내 학교 중에서는 네 번째, 도내 초등학교에서는 최초의 학교 협동조합으로 이곳 학부모와 교사로 이루어진 ‘팔판동 사회적 협동조합’이 운영하고 있다. 판동초의 ‘매점 기본소득’ 역시 팔판동 사회적 협동조합이 진행하는 것이다.
“항상 매점에 오는 학생들만 오더라고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제일 큰 건 역시 ‘용돈’이었어요. 가정 형편과 상관없이 용돈이 없거나 부족한 경우도 있고요. 그렇다 보니 학생들이 이 공간에서조차 ‘격차’를 느끼게 되는 거죠. 그런 경험을 하게 하려고 이 공간을 만든 게 아닌데, 어떻게 하면 이 차이를 없앨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됐어요.”
팔판동 사회적 협동조합 발기인이자 조합원이기도 한 판동초 강환욱 교사의 설명이다. 조금이라도 ‘공평한’ 소비권을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 마침 팔판동 사회적 협동조합 쪽으로 기부금 100만원이 들어왔다. 친환경 간식만을 판매하고 수익은 모두 학생 환원 사업에 사용했던 매점인 만큼, 기부금 역시 학생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당연했다. 자연스레 100만원은 이번 매점 기본소득의 종잣돈이 됐다.
“학교가 더 좋아졌어요”
매주 월요일 아침이면 학교 본관 2층 5학년 교실 앞 복도로 어린이들이 모인다. 1주일에 한 번 지급되는 매점 기본소득을 수령하기 위해서다. 매점 기본소득은 기존에 있던 ‘매점 쿠폰’을 활용했다. 쿠폰이 기본소득에 사용되면서 이제는 ‘매점 화폐’라는 명칭으로 바꿔 부른다.
기본소득이 지급되는 방식 역시 눈여겨 볼만하다. 누군가 ‘건네주는’ 형태가 아니라 복도 벽면에 붙은 기본소득 수령 게시판을 통해 각자 알아서 찾아간다. 이 역시 ‘누군가의 베풂으로 지급받는 용돈’이 아니라 ‘이 학교 학생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로서의 기본소득’이 되고자 함이다.
“아무래도 ‘용돈’은 가진 자가 베푸는 것이고, 언제든지 지급 여부나 규모가 바뀔 수 있는 거잖아요. 학교에서는 경제교육의 일환으로만 접근하게 되기도 하고요. 정기적이고, 무조건적이고, 모두에게 지급되는 점 등을 고려해 ‘기본소득’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다 싶었습니다. 매점 기본소득은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매점에서 사고 싶은 것을 살 수 있어요. 다만 각자 사용 내역을 별도의 기입장에 기록하게 하는데, 이건 최소한의 경제관념을 위해서지 교사나 부모가 침범하는 부분도 아니고요.”
이런 매점 기본소득이 처음 교사들과 학부모들이 감지했던 학교 내 불평등을 조금은 상쇄해주었을까. 변화는 학생들 사이에서 먼저 감지되고 있었다. 매점 매니저로 활동하는 6학년 설미진 학생은 “매점 기본소득 이후 매점에 못 오던 학생들이 확실히 많이 오고 있다”며 시행 전후의 차이를 설명했다.
용돈이 없거나 부족해 매점을 찾기 어려웠던 학생들 사이에서 ‘매점 기본소득’은 학교에 가는 재미가 됐다. 서우정(판동초 5) 학생은 “용돈을 못 받거나 부족한 친구들이 매점을 많이 이용하게 됐다”며 “저도 용돈을 받지 않는데 매점 기본소득으로 친구들과 함께 간식을 사먹을 수 있게 돼 정말 좋고, 학교에 오는 것이 즐겁다”고 말했다. 김호준(판동초 5) 학생 역시 “평소엔 용돈이 없어서 매점에 못 갔지만 요즘은 자주 가고 있다”며 “아침을 못 먹고 와서 배고플 때가 많았는데 매점에서 간식을 사먹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매점에 가는 것이 쉬워지고 부담스러워지지 않으면서 자연스레 학교라는 공간에 대한 재미를 붙였다는 것, 이는 판동초가 매점 기본소득 실시 3주차에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매점 기본소득에 대한 의견을 묻는 주관식 문항에서 ‘학교에 오는 이유가 늘었다’, ‘용돈이 부족한 친구들이 거의 매일 매점에 오면서 기분도 더 좋아진 거 같다’, ‘매점이 더 화기애애해지고 그동안 못 보던 친구들도 와서 좋다’ 등 긍정적인 변화를 느낄 수 있는 답변이 이어졌다. ‘용돈을 어떻게 쓸까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등의 답변도 눈에 띄었다.
학교 담장을 넘어 연대의 가치를 배우는
강환욱 교사는 학교에 오는 즐거움이 늘었다면 그 하나만으로도 이 공간의 역할은 충분히 다 한 것 아니겠냐고 말한다. 강 교사는 “심층 인터뷰가 필요한 부분이겠지만, 학생들 역시 전보다 골고루 매점을 찾고 있다는 것에서 마음의 불편함이 다소 해소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학생들이 말로 표현하진 못해도 학교의 즐거움, 나아가 학교가 학생들을 지지해준다는 인상을 얻을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런 ‘정서적 지지’가 건강한 성장을 도울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판동초는 매점 기본소득과 학교 협동조합 매점을 통해 더 많은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 우선 매점에서 배출되는 쓰레기 분리수거를 통해 환경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기후위기에 대해 공부했다. 그 흔적으로 매점과 학교 복도에는 학생들이 직접 만든 분리수거 방법과 기후위기 게시물이 빼곡하다. 이는 ‘마을 보행권’으로까지 이어졌다. 탄소 배출을 줄이는 이동수단으로 자전거를 이야기 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자동차 중심으로 설계되는 도로의 문제, 마을 안 보행권까지 돌아보게 된 것이다.
“이 좁은 학교만이 아니라 마을, 지역, 나아가 온 나라와 연대하는 것이 이런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생각해요. 학교 현장에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민주시민교육이자 사회적 경제 영역까지 아우르는 활동이 되기도 하고요. 이번에 옥천 안내중에서 청소년 기본소득 실험을 진행한 Too나 이런 활동에 관심이 있는 다른 지역 사람들이 함께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연대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강환욱 교사)
옥천과 보은, 가까운 지역에서 비슷한 시기 진행된 기본소득 실험은 앞으로 지역사회에 어떤 흐름을 만들게 될까. 섣불리 전망할 순 없으나, 이 이야기는 계속될 듯하다. 공동체 활성화라는 공통의 꿈을 꾸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곳에서 따로 또 같이 함께 하고 있을 것이므로.
한편, 판동초는 내년 학교 자체 예산으로 매점 기본소득을 실시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월간 옥이네 2020년 12월호(통권 42호)
글 사진 박누리
월간 옥이네는 자치와 자급, 생태를 기본 가치로 삼아 우리 지역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 사람 이야기를 담습니다. 월간 옥이네가 이 소중한 기록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구독으로 응원해주세요!